변화란 두렵다. 변화란 우리의 인생 속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중요한 기점이 되어주기도 하고, 매일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에 신선함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경우 자신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키리라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렇기에 변화란 신선하고도 두렵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은 어떤 결과가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변화를 포기하고는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 두려움이 있다고 당신은 변화를 포기할 텐가?’라고 영화 <더 포스트 The Post>는 묻는다.
* 해당 게시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더 포스트> 포스터 (C) 20 세기 폭스 - 네이버 영화
<더 포스트>는 60년대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베트남전에 관해 미국 정부가 4대 대통령에 걸쳐 숨기고 있던 추악한 비밀에 대한 폭로를 담고 있다. ‘세계평화’라는 명목 아래에 자행된 미국 정부의 폭력에 대한 정당화는 뉴욕 타임스의 기밀문서(펜타곤 페이퍼) 보도를 시작으로 대중에게 알려진다. 그러나 미 정부는 곧바로 추가 보도 금지라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대응했고, 그런 상황 속에 워싱턴 포스트는 기밀문서 대부분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사실을 보도하는 것만으로 법적 문제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 속 워싱턴 포스트의 선택은 무엇일까. 결말은 워싱턴 포스트의 펜타곤 페이퍼 보도를 통해 미 정부가 숨겨오던 추악한 비밀이 세상에 낱낱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의 결말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 포스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의 결말이 아니다. 그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있었던 사람들의 고뇌와 용기, 그리고 이를 통해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 속 모든 프레임 하나하나에 이야기를 담았다. (C) 20 세기 폭스 - 네이버 영화
강한 권력의 부정을 직면하면서 옳은 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펜타곤 페이퍼같이 정부라는 권력이 지닌 비밀은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기사를 쓴 기자 개인의 안위는 물론, 기사를 실은 회사 전체의 존속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건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트 사람들은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정의 구현에 대한 올곧은 마음을 갖고 자신을 향한 위협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것일까? 당연히 현실 속 인간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이들이 대업을 이뤄내기까지의 고뇌를 <더 포스트>는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펜타곤 페이퍼 보도의 시작에는 기밀문서를 빼돌린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기밀문서를 빼돌리기 위해 가방에 증거자료를 잔뜩 챙긴 후 정부 건물을 빠져나오기 직전 문 앞에서 멈춰 선다. 과연 자신이 기밀 유출이라는 지금 이 행동의 후폭풍을 책임질 수 있을지, 지금 자신 앞의 문을 나서는 순간 되돌릴 수 없이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 망설인다.
캐서린(메릴 스트립)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의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 소식의 발행을 다투는 직원들의 전화를 받는다. 그러고는 소중한 가족들이 평생을 걸쳐 꾸려온 회사의 존망과 회사 사람들의 미래가 달린 결정을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으며 내뱉는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들의 고민을 필름 속에 담아냈다.
<더 포스트>에 부담스러운 독백과 느닷없는 감정 고백의 혼잣말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출구 앞에 멈춰 선 발걸음, 전화기를 부여잡은 불안한 눈동자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 짧은 순간, 관객들은 그 찰나를 넘어 결정을 내리기까지 있었을 등장인물의 고민을 상상하며 그들의 용기에 감동하게 된다. 평범한 이들이 고뇌의 시간을 거쳐, 자신들뿐 아닌 소중한 이들에 대한 위협을 무릅쓰고 부정에 저항하는 모습은 태생부터 타고난 능력을 지닌 뛰어난 영웅의 활약보다 강한 울림을 관객들에게 전해준다.
카메라를 들고 <더 포스트>를 촬영 중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C) 20 세기 폭스 - 네이버 영화
수많은 고민의 순간을 찰나의 망설임으로 담아냈듯 <더 포스트>는 영화 한 장면, 대사 한 줄까지도 빼놓을 수 없는 꽉 찬 구성을 자랑한다. 특히 기자라는 직업에 강한 신념을 지닌 편집장 벤(톰 행크스)의 대사는 '기자와 언론의 소명'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보도 취소를 주장하며 이는 신중한 행동이라고 변명하는 직원에게 벤은 그것은 겁먹은 것에 불과하다며 비판한다. 이처럼 벤의 어쩌면 당연하지만, 현실에서는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웠을 말은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벤이 다음 대사로 어떤 말을 할까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더 포스트> 속 스티븐 스필버그의 치밀한 화면 구성 역시 매력적이다. 대통령이 딸 결혼식 취재를 금지한 것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에서 벤의 뒤 벽면에는 여러 그림이 걸려있다. 그중 화면에 깔끔하게 비친 3개의 그림은 미국 정부가 사람들에게 거짓을 고하며 베트남전을 정당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Have I Ever Lied To You’라는 문구의 포스터는 세계 1차 대전 당시 미군을 모집하는 포스터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 바로 아래의 그림에서는 ‘거짓말’하면 생각나는 피노키오 마냥 코가 긴 사람의 캐리커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의 그림에서는 백악관 앞에서 대변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아첨하는 자세로 기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미 정부가 베트남전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거짓으로 군인을 모집해 전쟁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상징한다. 이는 제작자가 영화의 작은 부분에도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감독은 그 치밀한 화면 구성을 통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감독이 <더 포스트>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언론 자유에 대한 탄압, 그리고 언론인의 소명이 전부가 아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동시에 가장 눈에 띄게 배치해 둔 영화의 메시지는 바로 캐서린의 성장이다.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소극적인 면을 보이던 캐서린 (C) 20 세기 폭스 - 네이버 영화
캐서린의 성장은 펜타곤 페이퍼 보도 사건과 함께 영화를 아우르는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이다. 지방지에 불과했던 워싱턴 포스트의 새로운 리더인 그녀는 남편의 죽음으로 회사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여성이 한 회사의 보스라니, 사내 이사진은 대놓고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며 캐서린 역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 영화 초반부, 아버지와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모습은 프리츠라는 또 다른 남성의 그림자에 가려있다. 이사진 회의에서는 머뭇거리는 그녀 대신 프리츠가 그녀의 의견을 정리해 준다. 프리츠에게 조언을 구하는 장면에서는 프리츠의 뒤에서 카메라가 캐서린을 내려다보는 구조로 비춤으로써 그녀의 지위가 프리츠보다 낮음을 보여준다. 특별한 의미 없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식사 장면에서는 남성들의 정치 이야기가 시작되니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는 여성들의 사이에 있는 캐서린을 비춘다. 신문사의 보스임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특정한 이야기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존재로 가두어 두고 있었다.
그런 캐서린이 여성이라는 틀을 넘는 것과 동시에 신문사의 리더로서 성장하는 모습은 <더 포스트>의 진정한 매력이다. 초기의 캐서린은 그간의 사교계에서의 습관대로 인간관계 유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문이 보도할 내용과 진실에 대한 폭로보다는 백악관과 전 장관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와 남편의 회사’를 망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여전히 ‘본인의 회사’라는 인식과 본인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라는 자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해당 장면에서 그간 친구라고 생각해 왔던 맥나마라와의 대화를 통해 점차 캐서린은 자신의 위치를 확립해 나간다. (C) 20 세기 폭스 - 네이버 영화
그런 캐서린을 정신 차릴 수 있게 해 준 계기는 바로 밤을 새워 읽은 맥나마라의 지시 하 이루어진 펜타곤 페이퍼에 대한 뉴욕 타임스 기사였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제작자의 은밀하게 뛰어난 화면 구성에 감탄하게 된다. 밤을 새운 그녀의 책상 위에는 군복을 입은 아들의 사진이 있다. 그녀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위치의 액자들 사이에는 맥나마라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밤새워 펜타곤 페이퍼 기사를 읽은 그녀는 맥나마라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치 뒤편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맥나마라라는 존재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보일 정도이다. 이는 캐서린의 심리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 역시 베트남전으로 아들을 보냈던, 미국 정부로 인해 희생된 한 명의 국민이었다. 그녀도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알고 있었지만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라고 믿었던 이는 그녀의 아들을 희생양으로 사용했고, 그녀는 그 진실을 다른 신문사의 보도를 통해 전해 듣게 되었다. 이에 드디어 친구와 언론인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역할 사이에서 캐서린은 자신의 위치를 확립해 나간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그녀의 완전한 성장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뒤의 장면에서 캐서린은 닉슨의 잔인함을 얘기하는 맥나마라에 자신감 넘치던 그녀는 사라지고 다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만다. 기사 보도를 두고 전화로 다투는 벤과 이사진 사이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소극적으로 그려진다. 논쟁이 오가는 사이 갈 곳 잃은 듯 헤매는 눈동자는 그녀의 불안한 심리를 잘 담아냈다. 또한 마지막까지 그녀는 프리츠의 조언을 구한다. 그녀는 드디어 신문사 이사장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판단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남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의존적 모습을 보인다.
(C) 20 세기 폭스 - 네이버 영화
하지만 확실히 인쇄를 시작하기 전 법적 문제에 대한 우려로 발생한 논쟁에서 캐서린은 완벽한 리더로 성장한다. 영화 초반 이사진 사이에 끼여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말을 끊는 이사진의 말을 중단하고 말을 이어나간다. 그녀에게 조언을 주는 조력자이지만 그녀가 자립심을 키우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던 프리츠는 드디어 화면 밖으로 벗어난다. 이 장면에서 화면의 중심에 있던 프리츠는 카메라 앞으로 이동해 의자에 앉는다. 화면에는 그의 검은 실루엣만이 등장한다. 마치 스크린 밖의 관객과도 같이 변한 그의 모습을 통해 캐서린이 더는 누군가에게 의존할 필요 없는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캐서린의 성장은 1960년대라는 시대 속 남성이라는 그늘에 가려있던 여성의 자립을 보여줌과 동시에 리더로서의 성장을 보여준다. 그녀 역시 영웅처럼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올곧은 마음과 초월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캐서린도 위협에 고뇌하는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 위협을 무릅쓰고 옳은 소리를 내는 것을 통해 성장한다.
(C) 20 세기 폭스 - 네이버 영화
우리가 항상 옳을 수는 없고 항상 완벽한 것도 아니지만 계속해 나가는 거죠. 그게 우리 일이니까요.
변화란 타고난 능력을 가진 비범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캐서린과 같이 차근차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변화를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위협과 고뇌에 망설이는 시간이 있을 거다. 우리는 출구 앞에 멈춰 섰던 그 발걸음과 같이, 전화기를 부여잡은 채 결정을 망설이던 캐서린과 같이 결정의 순간 앞에서 고뇌에 괴로워할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더 포스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너무 낙담하지 않아도 좋다. 역사 속 변화를 이끈 이들은 모두 고뇌로 가득 찬 평범한 이들이 아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