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 Jan 24. 2024

모든 삶의 수수하지만 굉장한 주인공들에게

[시네마 테라피] 드라마《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우연히 만난 이야기가 필요한 줄조차 몰랐던 위로를 전할 때가 있지 않은가? 일본의 첫사랑이라 불리는 이시하라 사토미 배우의 작품이 보고 싶어 출연작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그때 발견한 어마어마한 길이의 제목. 대중에 흔히 알려지지 않은 ‘교열자’라는 직업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구성해 눈길을 끌었다. 그렇게 만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가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마주하기 전까지는 필요한 줄조차 몰랐던 이야기.


좌 :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한국 포스터 / 우 : 코노 에츠코와 교열부 사람들 (C) NTV


주인공 코노 에츠코(이시하라 사토미)는 당차고 밝은, 긍정적이고 솔직한, 하지만 그래서인지 조금은 얄미운 구석이 있는 캐릭터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그녀의 스타일은 패션잡지, ‘라씨 Lassy’를 위해 일하고픈 그녀의 열정을 보여준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패션지 편집자의 삶은 그녀의 오랜 꿈이다. 하지만 꿈을 좇아 들어간 출판사에서 그녀는 패션잡지 편집 부서가 아닌, 원고의 모순과 오류를 교정하는 교열 부서에서 일하게 된다.

 

그간 꿈꾸던 화려하고 눈에 띄는 패션잡지 부서와 교열부는 극과 극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에 위치한 교열부는 신입사원을 반겨주는 이 하나 없었고, 근무하는 부서원들조차 칙칙하고 수수해 보였다. 교열부 부장에게 에츠코는 왜 자신을 교열부로 뽑았냐고 묻지만, 그녀로부터 교열자로서의 가능성을 엿본 부장은 그녀에게 교열부에서 근무하더라도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전해준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으면 희망 부서로 옮길 수도 있어요. 미래로 열린 문은 하나가 아니랍니다.” 그렇게 언젠가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패션지 편집자의 꿈을 위해 교열 업무를 맡게 된 에츠코. 그녀의 당차고 솔직한 성격에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생겨난다.


좌 : 패션지 편집자로서의 꿈을 꾸는 코노 에츠코 / 우 : "미래로 열린 문은 하나가 아니랍니다"라고 하는 부장과 에츠코 (C) NTV


에츠코는 늘 자신이 있을 곳은 다른 곳이라고 한다. 수수하고 지루한 교열부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패션 잡지계가 바로 자신이 있을 곳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패션잡지 부서로 발령받기 위해서는 교열부에서 열심히 일하며 성과를 내야만 한다. 평소 패션지 외 책이라고는 전혀 읽지 않는다는 그녀가 말이다. 보통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업무를 떠맡게 된다면 적응에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리고, 근무 태도 또한 엉망에, 성과는 당연히 잘 나오기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에츠코는 달랐다.

 

처음에는 에츠코도 자신의 상황에 억울하고 답답해했다.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온 직장에 후배는 아무런 열정도 노력도 들이지 않은 채 한 자리를 차지했지, 자신은 알지도 못하던 업무를 시작해야만 하지. 하지만 투정과 우울함도 잠시, 에츠코는 자신만의 당차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교열이라는 직업 또한 열정적으로 즐기기 시작한다.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편집자 카이즈카  “애초에 자기 일에 진심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너도 원해서 교열 일을 하는 건 아니잖아? 패션지를 하고 싶은데 억지로 하는 거 아니야?

에츠코  “아니, 그건 전혀 아닌데? 오늘 ‘뱀 키우는 법’이란 책 교열을 시작했는데, 이거 패션지 에디터가 되면 분명 도움 될 거야.”

편집자 카이즈카 “뱀 키우는 법이 무슨 도움이 돼?”

에츠코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일본에서 키울 수 있는 뱀 종류가 어마어마하대. 그러니까 에디터가 됐을 때 이 교열 경험 덕분에 다양한 뱀 무늬를 제안할 수 있잖아?”


사회생활을 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아니라면 적어도 사회생활을 오래 한 선배들이 한 번쯤은 얘기해 줬을 것이다. 지금 배우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고. 비록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고, 자신이 원하던 일이 아닐지 몰라도 지금의 경험들은 언젠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에츠코는 그 사실을 빨리 깨달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날을 향해 현재를 버텨내려고 하지 않았다. 현재를 ‘버텨내야만 하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쯤으로 여기지 않고, 매 순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얻고 배울 수 있는지를 찾았다. 그런 과정에 열정적으로 임하면서 그녀는 행복과 즐거움을 느꼈다.


비록 꿈꾸던 일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행복과 배움을 얻는 에츠코 (C) NTV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떻게든 이루고픈 꿈이 있으니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코노 에츠코는 물론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렇게 답하는 장면이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에 있다.


후배 모리오  “왜냐하면 난 선배처럼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니까”

에츠코  “응? 그런 거야?”

후배 모리오  “뭐랄까… 모든 사람이 선배처럼 꿈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 아니거든. 좋아하지 않아도 일이니까 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걸. 과연 이 세상에 재밌는 일이란 게 있기는 할까? 그런 생각이 들고는 해.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다들 그 일을 하겠지.”

에츠코  “아니야…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네가 즐겁지 않은 건 즐길 마음이 없기 때문이야. 일뿐 아니라 인생이든 뭐든 시시하다고 여기면 시시해져. 즐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마음먹기에 달렸지 않아?”


사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참으로 진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인생은 하나의 각본과도 같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제각기 다른 각본을 가지고 있으며, 작가에 따라 어떻게 전개될지가 예측불허할 뿐이다. 그렇기에 인생이라는 각본은 작가가 주인공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렸다. 주인공의 현재를 인내의 시간으로 설정한다면 그 시기는 빠르게 지나가 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암흑기가 된다. 그러나 인생은 마지막 종착점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바라는 꿈과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르는 그 순간만을 위해 거기까지의 여정을 견디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삶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우리는 당차고 밝은 성장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열정적으로 목표를 추구하고,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쉽게 넘어지더라도 빠르게 일어나는 법을 터득하며 삶이라는 한 편의 영화이자 소설을 꾸며나가야 한다.


물론 살다 보면 그렇게 당차고 밝은 에츠코가 이렇게 수수해질 정도로 힘을 내기 어려운 때가 오기도 한다. (C) NTV


물론 살다 보면 종종 이런 순간도 찾아온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한없이 작게만 보일 때, 혹은 그 누구도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이 볼품없고 하찮게 느껴질 때. 이러한 순간은 매일매일을 열심히 사는 그 어느 때라도, 꿈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는 여정에서도, 혹은 그토록 바라던 목표를 이루었을 때도 가리지 않고 예고 없이 찾아오고는 한다.

 

에츠코는 교열 일을 하며 점차 교열이라는 업무에 애정을 느끼고 더욱 열정을 쏟게 된다. 그러던 중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자신 있어하던 패션 분야의 교열 작업에서 큰 실수를 하고 만다. 그리고 교열 업무를 경시하는 패션잡지 부서 사람들 앞에서 에츠코는 점점 더 풀이 죽어간다. 자신이 애정을 느끼던 분야에서 실수하고, 자신이 하는 업무의 가치는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볼품없게 느끼고 있던 그때, 남자 주인공 유키토가 그녀에게 전한다.


유키토  “공원의 놀이기구도, 다리나 선로의 전선도, 모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점검해 줘. 그래서 온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아이들이 공원에서 안전하게 놀 수 있고, 사람들이 전철을 타고 다리를 건널 수 있어. 전부 당연히 하는 일이라 일일이 기뻐하지도 않고, 누가 점검을 하는지 신경도 안 쓰지. 하지만 전부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중략)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건 그걸 위해서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에츠코  “정말 그래… 왜 이렇게 당연한 걸 잊고 살았을까?”

유키토  “그래도 괜찮아. 점검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 못 할 만큼 당연하게 일하는 것. 그게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목표일 거야.  


세상 많은 존재는 그것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않고는 한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그리워할까. 존재의 소중함과 가치는 그것이 사라지기 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잠시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주위에 매일매일 당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에 우리가 하나하나 감사를 표하거나 가치를 칭송하지 않듯이, 어쩌면 당신의 가치는 이미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소중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또한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또 뭐 어떤가. 자신을 제일 잘 아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말과 같이, 자신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아주면 되는 것을.


에츠코  “해봤자 쓸데없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할 수 있는 한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싶어. 그래서 지금부터 또 쓸데없다고 여겨질 만한 일을 하고 올게!”
교열부 부장  “그렇죠. 아무리 고생해서 열심히 확인 작업을 해도 그 결과 내용에 틀린 게 없다면, 아무도 그 고생을 모르고 칭찬받을 일도 없습니다. 쓸데없는 작업이래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 교열부의 일입니다. 저희 직원들은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을 테니 말이죠.”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아는 당신의 가치보다 훨씬 빛나는 당신을. (C) NTV


우리는 타인의 삶에 있어서는 엑스트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이라는 길고 긴 이야기에서 만나는 수많은 등장인물 속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가는 단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와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는데,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 알 바인가. 남의 이야기에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지는 우리 마음에 달렸다. 차분하고 평온한 이야기를 쓸 수도, 역동적이고 도전으로 가득한 모험기를 쓸 수도, 성장과 발전을 거듭한 대서사시를 쓸 수도 있다. 그러니 모든 삶의 주인공들에게, 마지막으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의 엔딩 대사를 전하며, 오늘도 당신의 수수할지도 모르지만 굉장한 이야기를 응원한다.


유키토  “세상엔 꿈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다. 눈에 튀는 직업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직업도 있다. 개중에는 꿈을 이뤘지만, ‘내 꿈은 이게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눈앞에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칫 평범하게 반복되었을지도 모를 일상을 의미 있고 소중한 나날로 바꿔주는 방법임을 그녀는 몸소 보여주었다. (중략) 꿈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현재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수수하지만 굉장한 모든 사람에게…”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2016)

출연  이시하라 사토미,  스다 마사키

제작  NTV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