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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살이의 기억

by 돌돌이

난 부산 출신이고 서울에서 머문 시간은 길지 않다. 20살에 학교 때문에 한번 그리고 29살에 직장 때문에 두 번 서울살이를 했었다. 실패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만큼 난 부산으로 매번 도망쳐 내려왔다. 학교생활이 힘들고 일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타지 생활은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한 번씩 그 공간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머리를 휘저어도 쉬 사라지지 않는다. 내 머리는 그때의 아픔을 잊지 못하나 보다. 20살 부산 촌놈의 흑석동 생활은 딱히 이렇다 할 게 없다. 크게 놀지도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며 기억에 남는 행위와 추억은 한정되어 있다. 더 솔직하게 풀어내기엔 그 잔상들이 너무 진해질까 봐 자제하게 된다. 그때 갔었던 단비 분식과 비엔나커피가 맛있었던 카페는 지금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어느덧 18년이 흘렀고 흑석동의 주택과 하숙집이 즐비했던 공간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학교 앞에 돈까스 프랜차이즈가 들어왔었는데 프랜차이즈의 입점은 신기했다. 2004년은 그랬었고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지금처럼 참담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신의 위치에서 만족하며 살고 있겠지? CEO가 되겠다던 하숙집 룸메이트도 기억나고 삼성반도체에 입사해서 크게 한턱 쐈던 택견 동아리의 형도 기억난다. 국민은행에 나란히 입사했던 선배와 현대자동차에서 기다린다며 장난치던 형들도. 5급 행시를 준비하던 형도, 유명 일간지의 기자가 된 형도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내 주변에서 나를 이끌어주던 수많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이 마지막 직업이 될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기업에 문외한인 사람에게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면서 부장을 달기 싫다고 하소연(?) 하던 선배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관리자가 되면서부터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회사에서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존재가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내가 로테이션을 신청하거나 그만두지 않는 이상, 계속 같은 곳에서 일을 하게 된다. 간호부가 아닌 진료부 소속이어서 몇 년간 일을 익혀온 스텝과 손발이 맞는 간호사를 보내는 것은 진료부에서도 손해일 테니까. 잘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성장의 기회가 큰 것도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발전하고 배워가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이런 내 성향을 알고 같이 배우고 가르쳐주시는 교수님이 있어서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즐겁다.


아내가 서울에 놀러 가고 싶다며 이야기를 하길래 한번 써본다. 못다 한 말들도 많고 하고픈 이야기도 많다. 내 주변은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내 프리셉터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수많은 형들과 동생들은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밤에 주저리주저리 지껄이고 있지만 20살과 29살에 했었던 충동적이고 무모한 결정을 지금은 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때보다 겁이 많아지고 걱정이 많아졌다. 나로 인해 영향을 받는 아내와 아들이 있기 때문에 차선책을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넋두리로 끝날지 새롭게 도전을 해 나갈지는 미지수다. 아내는 새로운 도전을 해도 된다고 하지만, 쉽게 내딛기엔 세상이 쉽지 않다. 열 번의 도전을 시도할 수 있는 그들과, 한 번의 도전도 부담인 나와는 출발 선이 다르다.


이래서 밤늦게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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