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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국 Jun 14. 2021

간호사로 일하면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버렸다.

 생명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병원은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특정 파트마다 하는 역할과 업무가 다르고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부서의 특성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간호사는 산부인과 병동이나 수술실이 아니고선 생명 탄생을 마주하기 어렵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죽음은 더 많이 겪는다. ICU나 ER이 아닌 병동에서도 말기 암 환자나 중등도가 높은 환자를 케어하다 보면 어렵잖게 죽음을 목도한다.


 죽음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간접 체험은 할 수 있다. 사실 체험보단 목격하는 것이다. 문어적인 목도란 말을 쓴 것도 죽음을 저 멀리서 글처럼 본다는 느낌이 커서였다. 병동에서 일할 때는 주마다 사망 환자를 보았고 하루에 4명이 동시에 사망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때의 침울한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호흡기 내과 메인 병동으로 트랜스퍼를 기다리는 환자는 언제 받을 수 있는지 타병동 간호사가 독촉하듯이 전화가 왔던 기억이 난다. 환자가 사망을 했고 주 보호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남기긴 했지만 병원은 사망한 환자의 침상을 비어있는 자리로 표시할 뿐이었다.


 DNR(심폐소생술 금지, 연명치료 거부) 환자인 경우가 많았지만 갑작스럽게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말기 암 환자의 경우 언제 어떻게든 나쁘게 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예전 울랄라세션의 리더 임윤택이 사망하기 전, 수많은 악플에는 암이 아닌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암이 걸렸다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니지만 온몸에 전이된 말기 암 환자의 경우는 급격하게 몸 상태가 나빠질 수 있는 거다. 그때엔 내가 신규 간호사이기도 했고 교육을 받는 시기였지만 유명인이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호흡기 내과로 발령을 받고 일을 하면서 한 달 만에 경험했던 죽음의 수는 일평생 경험했던 장례의 수를 능가했다. 그리고 간호사 2년 차로 넘어가면서부턴 환자의 사망은 단순한 업무로 여기기 시작했다.


 공대를 다니던 20살의 새내기는 소설가를 꿈꾸던 문학 소년이었고, 간호학과로 오고 나선 호스피스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는 학생간호사였다. 그리고 간호사가 된 지 1년이 지나고 나서 내가 맡은 환자가 사망하게 되면 챙겨야 할 서류를 먼저 생각하고 장례식장 사용 여부와 수납 여부를 확인하며 퇴원(?)을 부랴부랴 준비하는 AI 노동자가 되어버렸다. 동정을 느끼고 같이 공감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전산상에 빈자리로 표시될 사망환자의 침상을 정리하고, 병실의 위치 조정해야 하고, 1인실 환자를 다인실로 옮겨야 하는 일은 이브닝 근무가 끝나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업무였다. 전원을 기다리는 다른 병동 환자의 불평과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선 감정적인 소모를 최소화하고 주어진 업무 시간 안에 빠르게 일처리를 해야 했던 것이다.


 나를 아껴주며 매번 음료수를 챙겨주고 말을 건네주던 환자분이 사망하고 나서 며칠 뒤에 그분의 아들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자신의 어머님을 마지막까지 잘 보살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장례를 잘 치렀으며 내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신규이고 아직은 서투른 20대 남자 간호사를 보면서 아들의 예전 모습을 보았고 생각이 많이 났단다. 나랑 이야기할 때엔 지방에서 일하는 아들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했었다.


마지막 근무로 기억하는 사진. 초점이 나간 눈빛은 덤.


 퇴근 후에 집에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간호과장님에게 퇴사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감정이 사라져 버린 메마른 나뭇가지가 돼버린 20대의 나. 싹을 틔우고 잎을 여는 가지가 아니라, 단순히 뿌리의 영양분만 빼먹고 있는 영혼이 없는 곁가지가 돼버렸던 것이다.


퇴사후 내 영혼을 살리기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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