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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로운 윤슬 Nov 25. 2021

공무원 시험 실패 후 스타트업 회사에 취업했다

열한번째 조각; 돌고 돌아 제자리에


2년 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다시 대학원에 복학했다.

다시는 디자인 할 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공시 준비를 했는데,

선배들이 "배운 게 도둑질이라 이거 말고 할 게 없다"라고 말하던 게 떠올랐다.


오랜만에 다시 돌아간 대학원.

2년동안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다.


학벌이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에 반박이라도 하는 건지

학생수도 부쩍 늘었고,

교수님들도 수업에 열의가 넘치셨다.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다가

창의력을 요구하는 대학원 수업을 오랜만에 들으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가고

적응하려고 노력하다보니

또 어느샌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만큼의 열정이 나오지 않아서

이번에는 수업 조교도 신청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과제들만 꾸역꾸역 해갈 뿐이었다.




하고 싶었던 것들도 왠만한 건 다 해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꿈이란 게 남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거라고는 소소한 사치 생활.


금전적 부담 없이 취미생활을 즐기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제 슬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던 중에 후배가 앱 디자인을 한다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앱 시장이 엄청나게 커질 거란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방학이 시작되면

그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또 괴로워할 게 뻔하기에 취업을 해야했다


몇년 간 수정하지 않던 포트폴리오를 조금씩 손보면서 채용 사이트에 올려놨더니

몇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면서 다양한 회사를 구경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나도 사회에서 쓸만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서 바닥났던 자존감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학업과 과연 병행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회사에 입사했다.


AR 앱 개발 회사.

운 좋게도 출퇴근 거리도 짧았고, 학업에 대한 편의도 봐주는 회사였다.




10년동안 디자인 작업은 항상 포토샵으로 했었는데

이 곳에서 피그마를 배우고나서는 포토샵을 켤 일도 없어졌다.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서

몇 년 만에 GDWEB을 살펴보는데

대다수가 반응형 웹페이지였다.


이제는 정말 웹, 앱 구분이 모호진 세상이 왔구나 싶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론으로 공부하다가

현업에 뛰어드니

많은 것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디자인 툴만 사용할 줄 아는 오퍼레이터는

앞으로의 세상에서 자리 잡지 못할 거라는 교수님의 말씀,


오퍼레이터는 인공지능으로 대체 될 거라고,

AI로 대체되지 않을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경영을 알아야하고, 컴퓨터 공학을 이해해야하고,

사람 심리를 아는

그런 통합적 사고가 가능한 기획자가 되어야한다


지난 10년간 웹디자인, 편집 디자인만 하다가

앱 개발을 시작하니까 UX/UI의 중요성이 사뭇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긴 새로운 꿈.

UX/UI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공부하고 싶어졌다


서울에서 UX/UI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대학 강의 나가는 선배들을 보면서 제자를 양성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 같고


또 다시 10년을 버틸 수 있는 꿈이 생겨났다






어디에선가 그런 글을 봤다.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그 일에 흠뻑 빠져있을 수 있다면 그건 좋아하는 일이라고,

일이라는 자체가 하루종일 즐거울 수 없는 거라고.


나는 '몰입'하는 경험을 디자인 일하면서 자주 겪었지만

그것이 감사한 일인 줄 전혀 알지 못하고 방황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다양한 일들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결실을 맺은 것도 있었고, 결실을 맺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결말이 아니라고 해서 그 시간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간이 삶의 큰 동력이 되곤 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고나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못 견뎌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는 내 감정을, 내가 느낀 것들을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그 수단이

디자인과 글이었다.



로또 1등이 당첨 되고 나서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건 진정 좋아하는 일이라던데,


나는 정말 솔직히

당장 이번주 토요일에 로또 1등이 당첨되더라도

똑같이 회사에 출근할 것 같다.


업무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보다

목표 없이 놀기만하다가 문득 느껴지는 무기력함이 더 무서웠으니까.


돈이 줄 수 있는 행복에는 한계가 있었다


외국의 전망 좋은 곳에서 비싼 밥 먹는 것보다

일이 풀리지 않아 머리 싸매면서 고민하다가 해결하는 그 순간의 희열이 내겐 더 값졌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화려하지 않아도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주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행복했다


평소에 갖고 있던 궁금증이 해소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런 사람이 나였다






20대에는 야근 없는 회사만 골라다니다가

지금은 야근도 하고 있지만,


피그마 다룬 경력이 없어서

지난 경력 다 묻어두고 신입으로 입사를 했지만,


출근해서 점심 시간 쪼개서 과제하고

반차내서 학교 수업 갔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바쁜 날의 연속이지만


야근 수당이 나오는 데에 감사하고

모르는 것을 친절히 알려주는 사수가 있어서 감사하고

허튼 생각할 겨를 없이 바쁜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내일도 일하다보면

또 그만 두고 싶은 순간이 분명 찾아오겠지만

잘 버텨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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