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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로운 윤슬 Mar 14. 2023

정상이 아닌 하나의 산 봉우리일 뿐

대기업 자회사에서 살아남기


최종합격이 발표나고 어느정도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급하게 서울로 이사를 가야하는 일정이었다. 고민 끝에 논문은 유예하기로 했고 그간 도움을 줬던 지인들을 만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입사하는데 도움준 지인분들은 정말 수고 많았다고 축하를 해줬다. 오래된 친구와 지인들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니 내가 합격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커리어를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모습을 봤다면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괜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촉박한 일정이라 집을 구하지 못해서 비어있던 사촌동생의 원룸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몇 번째 자취인지도 모를 정도로 별 감흥도 없었다. 그저 또 외로운 서울생활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마음 한켠이 묵직해졌다. 단촐하게 짐을 챙겨서 후다닥 짐 정리를 끝내고 출근 준비를 했다.




첫 출근날, 약간 긴장한 상태로 오버 핏 자켓과 검정 슬랙스 그리고 착용감 편한 로퍼를 신고 회사에 갔다. 큰 빌딩에 들어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로비 게이트에서 사원증을 찍고, 휴대폰 카메라에 보안 스티커를 붙였는데 약간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 출근 버스를 지원해주었다. 출근길에는 사내에서 지원해주는 토익 스피킹 강의를 들으며 출근했다. 수강학점을 채우면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출퇴근 시간을 쪼개서 쓰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 싶었는데, 어느덧 나도 새벽 다섯시반에 기상해서 출퇴근 길에 영어 공부를 하면서 살고 있었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느껴졌다.


통근 버스에서 내리면 서울 및 수도권 각 지역에서 온 버스 수대가 보였다. 흑백 프로필 사진이 들어간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이 버스에서 우르르 내려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본사와 거리가 있었는데, 먼 발치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개미군단처럼 보였다. 그렇게 우러러봤던 대기업 직원들도 옆에서 보니 그냥, 똑같은 일꾼이었다. 같은 머슴이라면 대감집 머슴이 낫다지만, 표정은 어찌 더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스타트업을 거쳐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프리랜서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회사를 경험했던지라 대기업의 장단점 또한 뚜렷하게 보였다.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열심히 굴러가는 기분. 그리고 업무량이 많았다. 게다가 내가 다니던 회사는 모(母)기업의 시스템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자(子)회사 시스템을 구축해가야하는 실정이라 예상보다 일이 더 많았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팀원 두명이 인사이동이 있어서 팀 자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심지어 입사 후에 팀원 두명이 퇴사했다. 더 좋은 곳으로, 더 좋은 연봉을 받고 이직해 가는 분들을 보면서 부러움이 드는 건 잠시, 밀려드는 일에 정신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른 부서는 우리 회사가 워라벨의 회사라고 하는데 나는 입사한지 몇주도 되지 않아 야근을 했다. 누가 시키는 건 아니었지만 회사에 빠르게 적응하고 싶었고, 업무에 능숙해지고 싶은 욕심에 야근을 했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버텨야했으니까. 

새로 알게 되는 업무가 있으면 개별적으로 매뉴얼 작성을 하면서 업무를 익혔지만 모르는 일이 계속 던져졌고, 업무를 물어보려니 사수는 많이 바빠보였다. 팀내의 실질적인 업무는 사수 혼자 다 하는 듯했다. 작은 회사에서는 다른 부서의 일도 내 일처럼 팔 걷고 도왔는데 여기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정글이었다. 업무분장을 확실히해서 나만의 영역을 견고히 해야하는 곳이었다.



최종 도착지라 생각한 곳은 하나의 산 봉우리일 뿐이었다.

대기업 타이틀만 보고 달려왔는데 막상 안에 들어와서 보니 자회사는 모회사의 연봉, 복지혜택, 대우 등이 80% 정도였다. 20대에는 이정도면 충분히 만족하고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원하던 곳에 들어가니 더 큰 세계가 보이고, 그 곳으로 가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에 한창 적응하고 있을 시기에 야구 시즌이 되었고, 임직원을 위한 야구 경기가 있다는 메일을 받았다.

회사에 구단이 존재한다는 것도 낯설었고, 뭔가 설렜다. 그저 신기했다.


회사에서 야구를 보러간 날. 나는 야근을 자처했다.

썰렁한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니 타부서 팀장님께서 나를 신기하게 보셨다. 야근이 습관된다 하시면서 얼른 퇴근하라고 하셨다.

칼퇴근하시는 팀장님인 줄 알았는데 일부러 퇴근 시간 때쯤에 잠시 자리 비웠다가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 돌아오셔서 밤 늦게까지 야근을 하시는 것 같았다. 


"이런 날 자주 오는 거 아닌데, 갔어야죠."라는 팀장님 말씀을 들으며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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