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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채색가 다림 Feb 01. 2022

내 마음속의 지우개

아이가 장난감 상자를 들고 내 앞으로 온다. 


"꺄아-"


와르르.


아이가 내 눈앞에서 상자를 뒤집어 쏟아낸다. 상자 속에 담겨 있던 온갖 잡동사니가 거실 바닥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한참을 여러 잡동사니들을 만지며 놀던 아이가 지우개를 집어 들었다. 


"지우개."

"응, 맞아. 지우개야. 율뽕이가 들고 있는 게 지우개야."


아이의 손에 든 지우개를 잡고, 아이의 가슴에 대고 쓱싹쓱싹 문지른다. 


"이렇게.. 쓱싹쓱싹.. 지울 수 있어, 지우개로."


쓱싹쓱싹이라는 의성어가 재미있는 건지, 가슴에 대고 지우는 시늉을 하는 내 제스처가 재미있는 건지 아이가 꺄르르 웃는다. 아이가 기분 좋게, 재미있게 놀 때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다. 


"율뽕아, 율뽕이는 누구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엄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누워서 육아 중인데도, 나랑 노는 게 제일 재밌다고 말해주는 아이의 마음이 신기하다. 엄마랑 노는 게 그렇게 좋을까. 아이의 마음속에 '엄마'라는 비중이 몇 퍼센트쯤 될지 생각해본다. 내 지분이 상당히 높은 시기를 지나며 몸도 마음도 지쳤다. 엄마 옆에 붙어 있을 때가 좋은 거라는 말은 결코 위로가 되지 못했고, 아이의 마음에 나 말고 다른 이들이 많이 채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아이의 마음에 지우개를 들고 들어가 온통 나로 점철되어 있는 부분을 조금씩 지우고 싶었다. 


그렇게 4년이 지나니, 바라던 대로 조금씩 아이의 마음에서 무언가 지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처음에는 내가 지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아이가 무엇을 지우고 있는지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아이는 '엄마'를 지운 다기보다는 '불안'을 지우고 있었다. 나와 한 몸이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알고 보니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사람이었다. 엄마와 떨어지면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시기를 지나, 이제 세상으로 조금씩 걸어 나가고 있다. 무사히 '불안'을 조금씩 지워가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준비를 하는 아이를 보니 아주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아이는 계속 지우개로 자신의 가슴을 문지른다. 그리고 꺄르르 웃는다.


쓱싹쓱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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