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밴쿠버에서 10개월 살다.
베이스캠프를 떠나, 밴쿠버로
나의 베이스캠프인 한국을 떠나 영어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리고 영어권 국가 중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져서 밴쿠버로 가볍게 떠났었다. 거의 7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밴쿠버는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나의 마음의 고향에 다시 돌아가 볼 수 있을까...
밴쿠버는 왜 나의 마음의 고향이 되었을까? 단순히 20대 후반 시절을 찬란하게 만들어준 곳이라서? 물론 그 황금기를 밴쿠버에서 보낸 것도 영향이 있지만 사실 밴쿠버 자체가 완벽한 도시다. 정말이다. 인생에서 겪지 않아도 될 험한 일들을 여기서 진액 뽑듯 겪었지만 완벽한 환경이 모든 것을 커버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도 현지인 위주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선한 사람이 많았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면서 그 흔한 인종차별을 랜덤으로 단 한 번이라도 당해본 적이 없다.
요즘엔 정말 그곳에 정착할라치면 중국인 이주자들이 집값을 다 올려놔서 서울과 진배없다고 들었고 지금은 얼마나 변해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2012년 내 기억 속의 밴쿠버는 나에게는 사랑과 같은 도시다.
비록 내가 아이스하키에 빠지거나, 겨울 스포츠를 즐기러 휘슬러로 떠난다거나 팀 홀튼(캐나다의 던킨도너츠)에 미쳐 체중을 늘렸다던가 하진 않았지만 남편이 장난으로 안티 캐나다 발언을 하면 나는 무조건 캐나다 편에 선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추운 걸 싫어하지만 그래도 캐나다에 있는 도시중 밴쿠버 날씨는 따뜻하다고 들었는데, 사실대로 생활하기 좋은 곳이었다. '레인쿠버'라는 별명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영 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면 나머지 계절의 날씨는 환상적이다. 특히 여름이 그중 으뜸인데, 땀을 많이 흘린 기억이 없을 정도로 습도도 높지 않고 햇살이 참 좋았다.
게다가 나는 다운타운에서만 살았는데도 캐나다의 대자연을 언제든지 너무나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고개만 들으면 이게 실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멋진 설산을 다운타운에서 본다던가, 깨끗한 물이 있는 호수나 강가로 대중교통을 타고 1시간도 안 걸리는 여행을 간다던가, 자전거로 돌아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스탠리 공원과 잉글리시 베이를 늘 품에 끼고 산다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과 같았다.
서울도 한강이 있지만 밴쿠버에 비하면 너무 도시화되고 인구밀도도 높고 분위기 자체가 아주 다르다.
그렇게 경기도 출신 서울러는 밴쿠버에 10개월간 머물면서 누군가에겐 지루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라이프 스타일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소중함을 배웠다. 아마 잠깐 오는 사람들이나 꽤 오래 밴쿠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밴쿠버의 기억이 담긴 블로그
밴쿠버에서의 첫 경험들
20년을 넘게 한국에서만 살다가 다른 나라에 살게 되니 새로운 경험 투성이었다.
처음 하는 수영장과 짐이 딸린 아파트에서 하는 솔라(발코니 혹은 베란다) 자취생활이었고, 처음으로 다국적(캐나다, 멕시코, 한국 여자) 룸메이트를 가져보았다. 지금이야 이태원에 가면 핼러윈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지만 캐나다에서 맛보는 핼러윈이 내 인생 첫 핼러윈이었다.
다문화 국가인 만큼 한국보다 다양한 멕시코 음식, 몽골식 철판요리, 인도네시아 요리, 그리고 빼놓을 수 없이 일식(초밥)들을 맛보았다. 분명 현지식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 음식은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약간의 퓨전 스타일로 바뀌어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몇 번은 홈스테이 하는 친구 덕으로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서 캐나다식 추수감사절 그리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경험했다. 몸무게 2kg 증량이 예측되는 뷔페식으로 차려진 서양식 메뉴는 그동안의 다이어트 강박을 이길 만큼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홈스테이 호스트가 진짜 너무 다정해서 소외감이나 낯섦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학원에서 남자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비록 콩깍지가 너무 빨리 벗겨져버려서 일찌감치 헤어지고 싶었던 게 문제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나라에서 많이 사용하는 향신료 딜(Dill)로 만든 요리의 독특한 풍미와 맛이 기억에 남는다. 애석하게도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모두 다 기억나진 않지만 한국에서 한국 친구들만 사귀었다면 경험할 수 없는 색다른 일들이었다. 돈으로 대체될 수 없는 좋은 기회였고, 물질적인 것보다 여행이나 문화체험에 더 관심이 많아 후자 쪽에 더 소비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 많은 백수가 된다면... 세계일주가 꿈이다.
밴쿠버에서 보낸 크리스마스이브 블로그
안 겪어도 될 밴쿠버에서의 경험들
1. 생에 처음 도둑맞다
밴쿠버에 온 지 두 달째 되는 어느 날이었다. 어학원 과제 때문에 스타벅스에 가서 랩탑을 펴고 앉아있었다. 졸음이 왔고 한 10여분을 졸았나? 뭔가 싸한 느낌이 나서 벌떡 일어났더니... 숄더백이 통째로 없어졌다. 그날은 부츠를 사려고 현금 100불, 이유는 모르지만 가지고 있었던 여권, 아파트 전자키, 랩탑 충전기 등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산지 2달 밖에 안된 아이폰 4를 탁자 위에 놓았는데 없어져버렸다.
스타벅스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로 조회가 안돼냐고 물어봤는데 협조를 잘 안 해줬다. 말하기론 서버가 본사에 있어 보고가 본사까지 도달해 영상을 보는 것 까지 약 1개월 이상 걸리는 상황이었다. 여권이라도 제발 발견할 수 있길 기도했지만 결국 영원히 아이폰과 내 여권, 현금은 찾을 수 없었고 역시 밴쿠버는 한국과 같이 치안이 좋은 것은 아니구나라고 느끼며 조심 또 조심해야지 하는 교훈을 얻었다. 나는 밴쿠버 주 보험을 신청한 상태라 혹시 몰라 심사기간 동안 가입했던 5만 원밖에 안 되는 여행자보험을 3개월간 들어서 도난에 대한 대부분의 손해를 커버할 수 있었다.
2. 생에 처음 잘리다
어학원 과정을 마치고 이제 남은 6개월의 생활을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는데 흔한 카페나 식당 서버 자리하나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이력서를 거의 20통 가까이 넣고서야 샌드위치 가게에서 면접을 보곤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훨씬 페이가 좋은 한국계 캐네디언이 운영하는 도심에 있던 광고업체에서도 러브콜을 보냈다.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샌드위치 가게에 일을 못하겠다고 정식으로 일을 시작 전에 연락을 취하곤 광고 회사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조폭같이 생긴) 보스는 5일 만에 본인 회사와 안 맞는 것 같다며 집에 가라면서 200불을 주고 나를 잘랐다. 애초에 기대치보다 낮은 스킬의 사람을 고용하고 두고 보다가 결국 안 되겠어서 일방적으로 자른 것이다. '같은 한민족끼리 이래도 되나? 애초에 채용에 신중했어야지! 너무한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수표를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는데, 비는 보슬보슬 오고 정말 서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계속 이력서를 넣으니, 워터프론트에 있는 다른 카페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다행히 일을 구할 수 있었다. 다운타운에서만 일하려다 보니 경쟁이 꾀나 심했었던 것 같다고 추측을 해본다.
3. 생에 처음 성희롱당하다
밴쿠버에서 처음으로 나를 일하게 해 준 카페 사장님은 인도계 캐네디언이라 인도 억양이 좀 있었지만 무난한 사장님이었다. 카페가 컨벤션센터 내에 있고 여객선이 많이 드나드는 항구 바로 옆이라 사람들이 많을 때는 많지만 없을 때는 한산한 곳이었다. 그래서 일하는 시간은 고무줄처럼 좀 왔다 갔다 했지만 그래도 작은 돈이라도 벌어서 다행이었고, 무엇보다도 초콜릿 카페라 초콜릿도 하루 4시간 일하면 몇 개씩 골라서 먹을 수 있고 눈앞에 바다가 있어 일할 맛이 났고 일 자체도 재미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니 그 인도계 캐네디언 사장의 슬슬 본색이 드러났다. 안고 토닥거릴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포옹을 몇 차례 시도했고, 느끼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뭐, 외국이니까 오픈마인드겠거니 하고 몇 차례는 넘겼다.
그러나 가장 강력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한참 밴쿠버 패션에 적응되서인지 하루는 타이트한 요가 바지 같은 운동복을 입었는데, 사장이 앞치마에 거의 가려져 살짝 보이던 내 엉덩이를 꼬집었다. 뭐 하는 거냐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시치미 때는 사장.
당시에 같이 일하던 그 사장의 조카들에게 말했더니 '그럴 리가? 그래? 참 이상하네 삼촌이...'라는 반응뿐 뭔가 큰 이슈가 되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장이 어이없었던 건, 조카들도 와서 가게일을 도울 뿐만 아니라 항공사에서 일하던 아내도 일손이 모자라 가끔 가게에 오는데도 창피함도 없이 본인이 고용한 직원을 성희롱하는 것이었다.
진짜 이 사장이 더 악질인 건, 나만 당한 게 아니라 다른 (동서양 막론한) 외노자들에게 늘 그렇게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것이며 이 사실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친구를 통해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정말 나는 (여성을 하대하는 사상이 깔린) 인도 남자들을 보면 치가 떨렸다.
고발을 할 생각도 했지만 방법도 잘 몰랐고 변호사를 고용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아마 사장은 외노자들이 실질적으로 액션을 취하기 어렵다는 이 사실을 악의적으로 이용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웹디자이너를 구한다는 업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일을 자연스럽게 관두게 되었다.
4. 생에 처음 교통사고 당하다
(교통사고라고 말하기엔 과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한참 도로 위 자전거 도로선을 준수하며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근데 파키스탄 또는 인도 계로 추정 되는 운전자의 택시가 너무 가까이 내 옆을 지나가려고 무리하게 질주를 했다. 자전거가 택시 문에 살짝 접촉이 되었고 나는 중심을 잃으며 사거리 한복판에서 넘어지게 되었다.
아픈 거보다 장 봤던 과일 같은 것들이 도로 위에 굴러다녀 그게 더 뭔가 민망했다. 사람들이 매우 놀라서 모여들기 시작했고 같은 한국인의 신고로 실제로 구급차가 오기도 해 잠깐 교통이 통제되긴 했다. 정말 다행히 가벼운 타박상과 까짐이 있었을 뿐 골절이나 피가 흐르는 정도의 사고는 아니었다.
기억이 정확히 나진 않지만 바로 사고 신고를 했던 나와는 달리 택시기사가 고의적으로 사고 접수를 늦게 해서 사고 후 무려 2달 정도를 기다리고 나서야 1000불 정도의 밴쿠버 주로 부터의 보상금을 받았다. 밴쿠버 주 보험이 얼마씩 납부를 해야 하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보험금 납부 금액의 이상의 보험금을 받았다. 이 보험금으로 약 3주 정도는 더 길게 해외여행을 떠났지만 무엇보다도 많이 안 다쳐서 천만다행이었다.
5. 10개월 동안 3번 이사하다
내가 밴쿠버에서 살던 첫 번째 집은 앞서 말했듯이 호화로운 2룸 아파트였다. 근데 '솔라'라는 1평 남짓한 베란다 공간에서 사는 건 멋진 야경을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에는 춥고, 침대에 걸려 책상 의자를 다 뺄 수 없을 정도의 공간밖에 없어 너무 여유가 없게 느껴졌다. 게다가 룸메이트 4명이 한 화장실을 같이 사용해야 하는 건 진짜 할 짓이 못 되었다.
그리고 같이 살던 갓 20살밖에 안된 유학생 렌트 오너는 종종 내게 도움을 주었기에 고마움이 있던 룸메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방을 우연히 보게 된 후 생각이 달라졌다. 홀로 커다란 마스터 베드룸을 쓰면서 화장실 사용도 자유로운데, 방세도 100~150불 정도만 부담하니 이 상황이 불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밴쿠버에 적응하고자 했던 목표를 달성했다고 느낀 시점인 4달 만에 그 둥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진짜 10군데 정도 집을 알아보다가 결국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두 번째 집을 만났다. 비록 사생활을 보장할 방문은 없지만 거실이 넓어 사용 공간은 훨씬 컸고 룸메는 총 3명이 전부였다. 아침마다 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오븐이 있어서 요리도 맘껏 해 먹을 수 있는 낡았지만 아름다운 3층 아파트였다.
나보다 10살이나 많은 룸메 언니랑 벽도 없이 허물도 없이 한 두 달간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렌트 오너가 다른 사람에게 집을 넘기면서 룸메가 1명이 더 늘어났고 나의 어두운 미래를 암시했다.
그 룸메들은 기자 출신 프랑스 커플이었는데 그들이 방문을 열면 나는 체취가 스며든 방 냄새도 고약했고 화장실 욕조도 너무 더럽게 사용하고 식기도 제대로 안 닦는 겉만 멀쩡한 더러운 사람들이었다. 포스트잇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며 신경전을 벌였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그래도 워낙에 내가 좋아하던 집이라 애써 참아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프랑스 커플이 렌트해주던 사람이 본인 소유의 건물이 아님을 알아내(이중 렌트 오너) 그동안 두 사람 분의 렌트비용을 받았던 그 사람에게 그 비용도 다 받아내고, 본인들이 이제 렌트 오너가 되어 나와 룸메 언니에게도 렌트비를 올려달라며 억지를 피웠다. 결국 이 커플의 깽판에 반 강제적으로 다섯 달간 살던 정든 이 집을 떠나 이사를 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딱 1달간 살았던 (사진 속) 세 번째 집은 이층 침대 거실에서 생활하는 집이었다. 난 일본인들은 다 깔끔하고 미니멀하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나의 선입견이었다.
이 집 렌트 오너도 어린 일본인 대학생이었는데, 관리의 개념이 전혀 없고 요리도 안 하는지 주방 쪽에 모든 물건을 다 쑤셔 넣고 화장실도 너무 말도 안 되게 더럽게 사용했다. 그래서 어차피 한 달 후에 나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청소하고 사람 사는 공간으로 만들어 놨다.
다행히 거실을 같이 사용해야 했던 다른 룸메가 거의 3주간 없어서 나 혼자 자유롭게 방을 쓸 수 있었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내 공백을 대신할 사람을 구해서 이 집을 떠나 그 당시 남자 친구네 집에서 룸메에게 양해를 구하고 10일 정도를 같이 살았다.
밴쿠버에서 집 구하기 팁 블로그
밴쿠버에서의 인연들
캐나다에서 사실 현지인 친구들은 많이 만나보거나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민자나 외국인 학생들 뿐. 그게 단기 어학연수의 현실이다. 그나마 내가 우연히 현지인이랑 얘기한 건 내 핑크색 신발을 보고 예쁘다며 얘기를 나누다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하라고 명함을 준 여자가 전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연들은 바로 룸메이트들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60%가 한국인이긴 했지만 서로 영어로 말하기도 하고 깊은 얘기는 또 한국어로 하기도 했다. 그중 단 한 명만 소식을 전하는 정도로 관계가 유지되긴 하지만 다들 겪어보니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40% 중 첫 번째 아파트 룸메였던 멕시코 친구는 성격이 화통하고 워낙 외향적이어서 함께 생활하면서 트러블도 거의 없이 친구 덕에 야밤에 바에 가서 늦게까지 놀기도 하고 잘 지냈다. 그러나 막바지에 손버릇이 안 좋아서 같이 사용하는 공금을 손댄 게 탄로 났고 결국 본인이 제 발로 나가게 되었다. (사진 속 사람보다 조금 통통하지만 닮았다)
이 친구를 통해 멕시코 사람들의 'Mañana' (내일) 성향을 경험했다. 약속을 해놓고 3시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 "아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했었지?" 라며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다. 내가 그녀에게 한 '오늘 학교 끝나고 집에서 보자, 난 6시쯤 올 것 같아.'라는 말이 그녀에겐 '5~6시쯤엔 집에 있어야겠다.'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반화 하긴 그렇지만 나중에 찾아보니 멕시코에서는 보편적으로 우리나라 말을 빌려 '언제 한번 밥 먹자' 같은 개념이 시간 약속을 하는데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즈니스 상황을 제외하고는 서로들 약속시간이 몇 시간이나 지나서도 나오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약속시간 자체가 정확치 않을 수 있다.
똑같은 첫 번째 집 룸메였던 미인 캐네디언 친구는 조금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는 친구였다. 바리스타였지만 풀타임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독립적으로 집을 렌트할 사정은 안되어 그곳에 살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본인은 운동 중독에 채식 생활을 하는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지만 남자 친구 취향만은 나쁜 남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기본 성향은 긍정적이고 올곧은 편이라 말이 잘 통했고 지금은 연락은 하고 있지 않지만 몇 년 전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
학교를 홀로 떠나 내 생일날 남자 친구를 만나러 어학원에 갔는데, 나와 생일이 같은 멜리사라는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많이 언니긴 했지만 워낙 활달하고 심화과정을 듣고 있어서 그런지 학원 사람들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생일파티를 크게 할 테니 나도 왔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서 생일 선물로 나를 초대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생일날 생일파티에 초대받고 그 주 주말 생일파티에서 현지인들과 유학생들이 섞여 어색하지만 또 즐겁게 보냈다. 그 친구는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제 캐나다에 정착해서 남자 친구와 고양이들과 함께 잘 살고 있다.
타이완에서부터 나의 결혼식에 와주었던 어학원 친구와 밴쿠버에서 잠시 일했던 직장에서 알게 된 친구와의 인연도 소중하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현재는 인연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친구들 중에 적지 않은 숫자가 지금까지 밴쿠버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호텔리어로 영상 편집자로 테크니션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특히 내 룸메 언니&연하의 영국 형부 그리고 부산 비보이 남자&우크라이나 미녀 커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힘든 사랑에 힘들어하던 룸메 언니는 대학원 다니던 중에 만난 영국 출신 학우의 짝사랑을 받아주어 몇 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해서 캐나다에서 살고 있고, 또 다른 내 친구 커플은 내가 다녔던 어학원에서 만났고 종종 함께 만남을 가졌을 당시 둘이 썸 타는 것도 눈치도 못 챘는데 귀국 몇 년 후 신앙의 힘으로 둘은 부부가 되었고 예쁜 딸 하나를 낳고 잘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어교환 명목으로 알게 된 퀘벡 출신 친구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른 글을 통해 해 볼 생각이다.
요리에 맛들이다
나는 워낙 먹는 걸 좋아해서 원래 원하던 목표의 몸무게를 만들 수 없었지만 성인 여드름 치료 목적으로 효소 제품을 먹으면서 40킬로대까지 진입한 적이 있다. 밴쿠버로 향했을 때가 그 정도였는데 두 번째 집에 살기 시작하고 요리를 해 먹기 시작하면서 원래의 나로 빠르게 돌아가게 되었다.
진짜 요알못이었던 나는 그 당시에 즐겨보던 블로거의 레시피를 따라 하는 것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최적의 조건이었던 것이, 내가 살던 밴쿠버는 국제도시라 온갖 나라의 식재료를 웬만하면 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요리의 즐거움에 눈을 뜨고 국이나 밥 한번 혼자 만들어보지 않았던 비루한 요리 능력치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원래 한국에 있을 때 엄마의 부엌에는 함부로 뭘 해서는 안되고, 내 맘에 드는 그릇 자식들을 들여서도 안돼며, 서양식으로 한 끼를 해결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내가 요리에 눈뜨며 다른 감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지금 남편과도 원활하게 한식만 고집하지 않고 식사를 다양한 메뉴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마 한국에서만 있었다면 다양한 식재료를 알고 다른 나라의 요리에 관심을 갖고 맛본다는 것 자체가 그냥 한번 해보지 뭐 정도였을 것 같다. 그리고 함께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통해서도 다양한 식문화와 종류를 체험할 수 있어서 밴쿠버에서의 10개월은 나의 '의식주' 중 특히 '식' 부분에서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쓰다 보니 너무 긴 글이 된 것 같지만, 밴쿠버 생활이 나에게는 나에게 주는 선물과 같았고, 내면 깊숙이 긍정과 다양성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단단하고 비옥한 토지와도 같았다. 이런 경험들이 기성세대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맘만 먹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참 좋았고 꼭 경험해야 할 통과의례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 공부해볼까 고민하는 26살의 사회 초-중년 생을 만났을 때는 과감하게 떠나라고 말했다. 나도 비슷한 나이에 고민했던 부분이었고, 여건이 충분하다면 사실 걱정하고 고민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지난날을 떠올려보니 나도 떠나기 전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갔다 와선 뭘 할까? 이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다.
여하튼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저지르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 무겁게 공부를 목표를 두지 않아도 80세 혹은 100세까지 사는 장수시대에 내 몸 성하고 건강할 때, 그리고 결혼도 안 한 싱글일 때 스스로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하던, 분명 스스로에게 '정말 잘 결정했어!'라고 얘기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