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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Jul 13. 2020

자살과 니체

니체가 자살에 관해 크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느껴진다. 그에게 자살은 두 가지 경우뿐이다. 노쇠했거나, 나약하거나. 본질적으로 두 상태는 행동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판단했기에 같지만, 그 판단에 이르는 원인과 과정은 다르다.

노쇠한 자의 자살은 힘에의 의지를 발산하는 것이 그의 육체가, 혹은 어떠한 것이 방해물이 되어 불가능해질 때 일어난다. 불가피하고 완전한 쇠약이 강자에게 찾아왔을 때, 담대하게 그 종결을 받아들이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인한 용기는 초인이 아니고서야 갖기 어려울 것이다. 노쇠함을 느끼고 자기 스스로 인류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나약한 자의 자살은 약자의 자살이다. 니체가 이를 언급하지 않은 건 그럴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살자들을 탐구하고 연민할 겨를이 없었다. 도덕적, 윤리적 전통을 넘어선 그의 관점에서 그들은 초목의 양과 다르지 않다. 겁에 질리던 우울함에 묻히던 허무를 비관하던, 생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약자의 자살 역시 생에의 의지에서 기인한 행위이나, 강자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니체에게 이런 자살은 눈 여겨볼 것 없는, 허무주의에 짓눌린 약자들의 행위일 뿐이다.

자살은 결국 굴종이다. 삶의 부조리에의 굴종. 인간은 강자와 약자를 넘나든다. 완전한 초인은 없다. 인간이란 존재에게서 초인이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초인은 새로운 초월적 표상을 말한 것이지만, 초월이 늘 그렇듯 실재하긴 어렵다. 철학적 관념으로서의 초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언젠가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나타나겠지만, 인간으로서 초인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 고통스럽다.

모두가 강자와 약자로 이루어져 있다. 약자가 의식을 지배할 때면 죽음에 처연히 노출된다. 자살을 생각한다. 여기까지만 하는 것이다. 굴종이든 약자이던 죽음 앞에선 부서지기만 하는 언어이다. 죽음은 그럴 때면 열정적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죽지 않고 싶다. 자살 같은 건 하기 싫다. 오늘 같은 날이 천 번 반복되더라도 자살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기 싫다. 자살을 입에 담기도 싫다. 그러나 정말로 천 번이나 반복되면 난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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