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엔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삶은, 찰나는 아름다우나 영속적인 가치는 없는 불꽃놀이인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인간 종을 위한 거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번을 고민해도 내가 이 생에서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가설이고 해석일 뿐이다. 진리는 없다.
친구가 내가 너무 과하다고 했다. 내가 의미 없다고 말하는 어떤 것들은 옳지만, 나는 너무했다. 어느 정도의 회의주의는 동의하나, 만물에 그 회의성을 주입하는 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맞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나는 당장 나가서 짓눌리는 머리통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의미의 부재를 통감하고 그렇게나 앵무새처럼 말하고 다닌다면, 살아있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친구는 내게 삶마저 무의미하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말해버리면 앉아서 대답을 하는 나의 정체가 너무 묘연해지기에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살아있다. 연기와 재의 한가운데에서 구토감과 두통을 참으면서, 우울을 이겨내려고 인간들을 부여잡으면서 살아있다. 그러기를 지속한다. 죽지 않기를 계속한다. 아직까지는 그러길 멈추지 않아왔다.
근데....... 모든 건 정말 무의미하단 말이야. 내가 혐오하는 것들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 모두는 결국 허무로서 끝난단 말이야. 나의 삶은 허무이고 인간 종은 허무이고 우주는 허무란 말이야. 사실은 죽고 나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란 말이야.
실존주의는 생의 순간에 전념한다. 죽음은 삶의 명백한 문제지만,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만큼 그것에 대하여 완고하게 저항한다. 죽음이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의미를 앗아가지 못하도록 거부하고 반항한다. 허무를 느끼되 거부하는 철학인 것이다.
이건 결국 살아가는 것이 좋은 인간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 또한 그 변명의 일부이다. 나는 생이 너무나도 좋은데, 이것이 무의미함을 알고 있다. 인간들의 미소가 좋고, 음악이 좋고, 살과 피부와 영화와 대화가 좋은데, 모든 건 녹아내리듯이 공허함을 알고 있다. 아름다운 것은 덧없고, 삶 또한 마찬가지임을 안다. 덧없음마저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만, 본연의 삶들이 덧없이 뭉개질 때가 된다면, 인간은 그 아름다움마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계속 너무 멀리 봐버린다. 분명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우울은 살아 숨 쉬는 인간 안의 해골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오늘만큼은 이런 마음을 즐길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은 열심히 운동하고 음악을 들으며 니체를 읽다가 잠들려고 했는데, 절망이 깃들어 흐름을 뜯었다. 가라앉는 기분이 나를 이 문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문은 스스로 열려 방의 풍경을 보이고, 나는 그것을 얼핏 훔쳐본 것만으로 깊은 상실에 빠지는 것이다. 지금 나는 주황빛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은데 자꾸만 흐리고 흐물텅한 기분이 내 입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우울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기인한다. 나의 우울은 치유되거나 변화할 수 없는 나의 면에서 자라난다. 아들러는 열등의식이 우월 의식을 강화시킨다고 했다. 열등감이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내가 지향하는 우월의 고지는 높아지고, 그에 닿지 못하는 초라한 나의 현실이 나를 갉아먹는 것이다. 깊은 절망을 자아내는 것이 고작 열등감이었던 것이다. 나의 열등감이 아주 피상적인 분야에 머물러있다는 것이 우습다. 나의 껍질, 나의 외양이 나를 짓누르는 것이다. 망각이나 회피를 원동력으로 살아가던 나를 부수고 현실이 들이닥치면 나는 놀라 넘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버린다. 몸은 멀쩡하지만 마음의 병은 몸으로 흐르곤 하기에, 내 손발은 급속도로 차가워져 절망의 향기를 마디들에 머금는다. 차가운 손을 이마와 눈두덩이에 겹쳐 얹으면, 거대해지는 우울과 냉기가 맞닿아 대체 무슨 기분을 지어야만 하는 걸까 하는 배회감이 내 주변을 소용돌이 치곤한다.
하지만 그 순간을 지나온 나는 동일하게 살아있다. 나는 극히 괴로웠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삶을 갈망하여 어지러운 와중에도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계속 살아간다. 이제 나는 삶이 무의미하느냐는 질문마저 부정하지 못한다. 친구에게, 그렇다, 삶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자주 내린다. 그치만 나는 살아간다. 힘의 의지이든 자기보존이든 반항이든 어떤 화려한 치장을 한 목적이든 상관없다. 삶이 좋다.
나는 쇼펜하우어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삶이 공허인 것을 안다. 허무인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의 내가 진실 앞에서 한없이 절망적이고 슬픈 인간인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게도 팽배한 니힐리즘 앞에서도, 허무주의자들, 쾌락주의자들, 우울한 인간들과 자살하는 인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 삶이란 것 자체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 나도 살아간다. 무의미를 딛고 삶을 대면하며 사는 것이다. 죽는 것은 옵션 외이다. 무의미해도 상관없다. 본질을 좇는 것이 무의미해도 좋다. 이젠 오히려 홀가분해진 것이다. 모든 것은 무의미하므로 인간은 모든 것을 좇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