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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Sep 27. 2020

대학 속의 또다른 학교가 되다

대학의 사회적책임 (USR)에 관한 고찰

열번째 에피소드이다.


저번 에피소드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갑작스레 단체를 이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단체는 아니었는데, 단체가 자연스럽게 되면서 리더가 되었다. 경북대학교를 다니면서 항상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시험기간 빼고는 텅텅 빈 강의실' 나 역시! 공부를 시험기간에만 하는 전형적인 벼락치기 선수였기에 할 말은 딱히 없다.


그 강의실에서 문닫은 공부방 조손가정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대학 주변 동네에 사는 아주머님이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아내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슨 자신의 가정이 학원보낼 형편이 안되는데 공부를 좀 가르쳐줄 수없냐는 거였다. 아마, 그때 내가 거절했다면? 그래! 거절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나만의 '불공정함'의 현장을 목격했는데 어찌 도망갈 수 있겠는가.


하나, 둘 아이들이 경북대학교 강의실로 저녁마다 모여들었다. 지도교수님께 한번 깨졌고 단과대학을 관리하시는 경비아저씨께 또 한번 깨졌다. 아이들이 첫 의도와는 다르게 스물명 가까이가 되니 시끄러워졌고 강의실이 더러워졌다. 아마, 그때 내가 깨진 것이 기분 나빠 그대로 그만두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만두지 못했다. 여기서 굴복하면 '불공정함'에 대한 내 스스로의 합리화이니깐.


한번 더 위기에 봉착했다. 또 다른 아주머님께서 '영어'를 가르쳐줄 수 있겠냐였다. 나는 공대 출신으로 수학과 과학에는 천재성이 있었고 언어능력은 유전자로 인해 뛰어났다. 하지만 영어는 거의 중학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쩌지? 못한다고  할까?' 아마, 그때 내가 거절했다면? 그래! 거절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학내 경영학과후배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우리 같이 하자'


그렇게 과목을 세분화하고 분반을 하고 커리큘럼을 보완하고 심지어 간이 교재까지 만들었다. 공과대학 강의실 일부를, 그리고 경상대학 강의실 일부를 단과대학장님과 만나 담판을 지었다. 담판의 과정은 서희의 강동6주 담판과 비슷하다. 협약을 하고 1년마다 실적에 따라 갱신하기로 했다.


한참 정신이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주마다 사백명이 오는 대학 속의 또다른 학교가 되어 있었다. 전화인터뷰 등으로 아이들에게 직접 연락해 부모님, 그리고 본인에게 학업의지를 확인했고 단순하게 입시과목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 대학전공을 커스토마이징하여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진로상담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패키지 형태를 만들어서 동의하에 진행하였다.


즉, '본인 희망 입시과목 + 대학전공(건축학, 경제학 등) + 진로상담' 과정으로 교육 커리큘럼을 구성했다.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난 '불공정함'이 싫었을 뿐이다.


나는 항상 대표로 불리기보다 '선생님'으로 불리는 걸 더 좋아했다. 최초, 나는 선생님이었고 나를 소개할 때도 '아이들 공부가르쳐주는 선생님'이라 말했다. 그러나 단체가 커지다보니 나는 교감의 역할, 그리고 교장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게 이십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제일 힘들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외로웠다. 누구한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밖에서는 활발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 이 단체는 전국 국립대학 열세개로 동일한 사회혁신 모델이 퍼져나가면서 연방형으로 성장했다. 10주년이 되었을 때 누적된 데이터를 확인해보니 5만명 이상에게 교육 혜택을 준 것을 확인했다. 연 평균 5천명의 아이들에게 사회의 냉대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며 절대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답해줬다.


자연스레 언론은 나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내게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고 했다. "음.. 단체가 해산되면 좋겠는데요?" 기자님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했다. "사실 저희가 지역거점 국립대학이라는 것으로 잘 된 거잖아요." "우리는 본업이 아닌 대학생들이기에 한계가 있지만 만약! 공식적으로 대학 본관 교수,교직원들이 저희가 하는 모델을 대학 예산을 활용해서 한다면 저희는 해산시키고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대학의 사회적 책임(University Social Responsibility)이란 용어로 불렸다.



커피 한잔의 여유

국회와 사회적기업, 스타트업CEO, 변호사(로스쿨준비생)


소개      

김인호입니다. 20대에는 사회적기업가로 살았습니다. 30대에는 국회비서관, 스타트업CEO, 변호사로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40대에는 제 생각을 펼치며 사회를 설득시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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