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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Aug 14. 2024

꿈 속에선 아버진 걷는다.

영 케어러가 느끼는 희망과 절망 그 사이

279번째 에피소드이다.


얼마 전 아파트로 한통의 통지서가 날라왔다. 한참을 확인 못하고 있다가 엄마의 불호령에 우편함을 뒤지니 그 통지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장애 판정 통지서다. 순간 모든 시간과 공간에 정적이 흐른듯했다. '흠,,' 무언가 곤란한 현실을 마주한 느낌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병원에서 엄마가 장애등급 판정 후에 혜택도 많던데 전기세 인하가 있으니 덥게 있지 말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면서 무더운 여름을 지내라고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듯 했다. 낙천적 성격을 소유한 아버지였지만 내가 장애판정 통지서를 사진 찍어 가족 카톡방에 공유하니 그 이후부터 말이 없다. 그렇게 우리 모두 말이 없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공상'을 자주 하곤 했다. 아버지는 당분간 우리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었고 엄마는 출퇴근을 가늠할 수 없는 비정규직으로 일했기에 나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상당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언가를 계속 상상하며 에피소드 속 주인공이 되어 악당을 물리치고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내는데 노력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때는 PD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공상'하며 만들어낸 희망찬 컨텐츠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고 싶어서였다. 그런 '공상'은 꿈까지 이어졌다. 꿈을 꾸면 깊게 잠들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깊게 잠들어본 적이 없다. 요 며칠 계속 꿈에서 아버지가 걷는 꿈을 꾸곤 했다. 벌떡 일어나 현실과 꿈의 경계선을 희석시키며 손을 아래 위로 흔들어댄다. 마치 꿈이 현실인 것으로 치환되길 바라는 맘일꺼다. 그런 꿈을 꿀 때마다 내 친구 구글에 '꿈해몽'을 검색해본다. 길몽인가요? 흉몽인가요? 21세기 사회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샤머니즘 속에서 계속 미래의 희망을 갈구하곤 한다. 나 역시 그 부류 중 하나이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꿈을 꿨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더 절망같이 느끼는게 하는 건 희망을 준 이후 가차없이 내려오는 절망의 큰 그림자이다. 그래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접고 만다.


나는 현재 희망과 절망 그 사이 어디간에 서있다. 꿈 속에서 본 아버지는 대학교 교수, 교직원들이 자신들을 보러 온다는 소식에 주눅들지 않기 위해 두발로 다시금 일어섰다. 꿈 속이지만 참 그 답다. 그 다운 발상이라 꿈 속에서도 피식 웃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최근 부모보단 한 남자로 더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두발로 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현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60대 남자로 말이다. 그렇기에 더 애틋하다. 내가 평생 봐왔던 그는 항상 그 다웠다. 성공보단 실패가 더 익숙했지만, 낙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그다. 얼마 누나네 가족이 왔을 때도 손주들을 보며 "이거 별거 아니야. 할아버지 벌떡 일어나 철마 한우 사줄께"라고 낙천적인 모습을 한껏 뽐냈다. 그 모습에서 나는 희망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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