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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Feb 19. 2021

질문이 너무나 당연한 사회

대학원을 다니면서 든 대한민국 교육 문제

쉰다섯번째 에피소드다


공대를 다닐때, 이런 적이 있었다.


"교수님! 저 질문 있습니다."


수업을 듣다가 손을 들어 질문한 학생에게 교수님은 "학생. 공대스럽게, 공학자스럽게 질문을 해. 그렇게 밖에 질문을 못하나?"라며 오히려 다그쳤다. 공대스럽게 질문하라니.. 그게 뭘까? "교수님. 외팔보의 토크가 3이 모자란데, 좌굴현상이 일어나 그 효용성을 확인할 수 없고 안전계수를 곱하는 적정 값이 올바른지 확인해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쭙니다."라고 물어봐야하는걸까?


당연하지만, 그 수업에서는 질문이 없다. 모두가 질문을 하면 핀잔과 꾸지람을 들을까봐 누구도 손을 들지 않는다. 그 분은 나보다 훨씬 더 학식은 뛰어날 수 있으나, 최소한 내 관점에서는 이 시대의 교육방법론으로는 올드하다. 질문은 허무맹랑하고 엉뚱할 수 있다. 그것을 교수, 수업구성원이 받아들여줄 수 있는지의 분위기에서 그 질문 다음의 사고확장성이 생긴다. 여기서 혁신성은 나오는 것 같다. 누가 알겠는가? 그 질문이 나중에 노벨상의 모태가 될지. 혁신을 한다며 사고의 틀을 닫아버리는 것은 입으로만 외치는 전형적 구호에 불과하다.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회가 더디어 보여도 내재적 사회자본의 축적을 이룰 수 있다.


대학원 운영 방식은 사실상 거의 방목에 가까웠다.

토요일 토론식 수업이 가장 기업에 남는다. 보수적 성향이 짙은 나와, 신용불량자 구제를 위해 젊은 시절을 바치신 진보색이 짙은 한 선배는 항상 대립하기 일수였다. 제주도에 있는 누군가의 사례를 던져주며 이건 '사회적경제 또는 사회적기업'으로 봐야하는 것이냐는 주제에 완전 날이 설 정도로 설전을 벌였다. 기업이란 생존을 영위하기 위한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한다는 입장 vs 사회적기업은 기업보다는 운동에 가까우므로 그 목적과 동기로 봐야한다는 입장. 매주마다 피터지게 그 선배와 논쟁한 것 같다. 하지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항상 맥주를 함께 마셨다. 내가 선배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 그렇게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나는 그 선배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운동을 했다고 했지만 그 선배에 비하면 정말 비단길만 걸어왔다. 괜찮은 수준의 대학에 가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많은 주목을 받았고 그에 발맞춰 나 역시 성장할 수 있었다. 참! 실력과 진정성보단 운이 좋은 것이다. 난 그 선배보다 진정성이나 생존력은 없었다. 그에 반해, 선배는 대학시절 신용불량자들의 대부분이 빈민임을 알고 빈민구제 활동으로 신용불량자 구제를 선택했고 쪽방촌 그리고 달동네 빈민촌을 찾아다니며, 아니.! 정확하게는 쫓아다니며 한사람, 한사람 말도 통하지 않은 사람들을 앉혀놓고 자활시키고 삶을 영위하게 제도를 알아봐주고 그들의 현장에서 삶을 살았다. 그 선배와 내가 비록 동시를 겪어보지 않았을지라도 선배의 발자취는 누구보다 더 어렵고 용기있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와 생각은 다를지언정, 그리고 엄청난 논쟁이 있을지언정 그 선배가 생각하는 관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내 관점을 편협함을 보완해주는 좋은 파트너였다. 대부분 그런 수업이 많았다. 결국 공부는 내가 찾아서하는 것이다. 큰 아웃라인만 잡고 그 속에서 철학과 관점을 찾아가는 건 내 몫이다. 교수님, 그리고 선배님 등은 파트너지 그들이 '나'란 사람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듯이 '나'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시작은 질문.! 그리고 질문이 너무나 당연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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