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미 오래전에 감정은 끝이 났으나 관계는 끝맺지 못한 관계가 있었다. 그 관계를 정리해야 함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란 참 어려웠다. 살다 보면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심리학 공부까지 하게 된 나로서는 누군가에게 모진 소리를 해야 하는 순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상대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명백하게 끝나버린 감정에서 무얼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복되는 만남과 그 만남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허함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말했다. 빨리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위한 일이라고. 나도 안다. 알아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을 뿐이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털어놓는 일은 언제나 큰 용기를 수반한다. 그게 사랑을 말하는 고백이던, 끝을 말하는 이별이던. 그래서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더는 미뤄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 들 때까지 말이다. 기어코 마음을 먹게 된 것은 대수롭지 않은 계기에서였다. 피하고 피하던 만남을 더는 피할 수 없었던 어느 날, 함께 있어도 설렘은 느껴지지 않던 내겐 그저 의무감만이 남아있는 데 비해, 그의 눈동자에 가득한 반가움과 사랑을 느꼈버렸달까. 그걸 보는 내가 어떻게 죄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뿐이었다. 어느 누군가 말마따나 그를 위해서라도 헤어지는 게 낫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이별은 고백과 참 많이 닮아있다. 고백도 타이밍이 중요하듯 이별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한참을 눈치 보듯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 암울하고 날카로운 말을 전하기 위해서 이토록 조심스러운 태도라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 칼날을 쥐고 기다리기엔 내 손이 너무 불편했던 어느 날, 난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던지듯 말을 남겼다.
“헤어지자고. 그 얘기 하려고 그랬어”
그제서야 어렵게 시간을 맞춰 나눈 대화 끝에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더는 회생할 수 없는 관계. 이 말을 꺼내기 이전으로 관계를 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 이상은 그 누구의 노력도 무의미했다. 그는 상처 받았고, 나는 상처를 줬다. 어떤 이유에서건 상처를 준 사람은 상대의 원망도, 차가워지는 태도에도 할 말이 없다. 어느 무대 위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가 된 듯 헤어짐에 나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나의 약간의 이기심을 더하자면, 이별이란 결국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누가 누구에게 헤어짐을 전하건 결국 이별을 하는 것은 둘 모두이다. 내가 헤어짐에 슬퍼할 자격은 없으나, 헤어짐에 슬프기는 하다는 이 모순덩어리 삶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나의 씁쓸하고도 무모한 시도를 해내고야 만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다. 어쩌면 이미 혼자였으나, 비로소 정말 홀로 되어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