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연 Aug 23. 2024

나의 생애 첫 기억

: J에게

J에게



 이제는 그림이라면 치를 떠는 나지만 어쩌면 그림은 내게 운명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첫 돌을 기억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아마 착각일 거라고들 했지요. 사람은 그렇게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면서요.


 하지만 그 순간 내 뇌리에 남은 색색의 장면들은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지요. 부연 안개가 껴있듯 흐린 기억이지만, 안개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찰나의 몇몇 기억들이 나의 처음을 지키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먼 훗날 당신에게 물어보니 그건 나의 첫 돌 때의 장면 중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받을 수 있었지요.     



 나의 첫 생일을 위해 당신이 입혀주신 새하얗고 까슬까슬한 드레스 차림으로 나는 그곳에 존재했죠. 손에는 여러 색의 막대들이 들려있었고요. 그걸 왜 들고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요.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어요. 나는 단지 그 색들이 너무 예뻐서 자랑이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단순한 이유였지만 그날의 감상이 강하게 남아있어요.


 그것을 들고서 이리저리 자랑하러 공간 안을 돌아다녔던 유년기의 나를, 나는 여전히 기억해요. 사촌오빠에게 달려가 손에 들려있는 막대들을 보여주고, 누구에게 뺏기기라도 할까 봐 한시도 손에서 초를 놓지 않았지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조금 더 자란 나는 내 손에 들려있던 그것이 양초였다고 확신했지요. 프랜차이즈 빵집에 가서 케이크를 사면 나이를 물어보고 그 수에 맞춰 넣어주곤 했던, 생일 케이크에 꽂는 그런 흔하디흔한 양초. 그것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막대와 모양도, 색깔도 똑 닮아있었거든요.


 그래서 케이크를 살 때마다, 조심스레 꽂히는 그 양초들을 볼 때마다 나는 유년기의 나를 떠올렸어요. 저게 어릴 적의 내가 그리도 좋아했던 그것이라고 말이에요. 이따금 사람들에게 가장 첫 번째 기억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말하기도 했어요. 나는 돌잡이 때 초를 잡았다고. 그저 색이 너무 예뻐서 마음에 들었고, 그 빛깔들이 내 마음을 울렸던 기억이 난 여전히 난다고.


 돌잡이 물건의 의미를 찾아본 적도 있었지만, 양초나 초에 관한 건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잡은 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상상도 해봤지요.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마음에 온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였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어요. 초는 스스로의 몸을 녹이고 태워 빛을 밝히는 물건인데, 나도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당신에게 전해 들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어요. 그날 내가 손에 들고 돌아다니던 그것은 색연필이었어요. 그래서 당신께서는 내가 커서 미술을 하려나 보다 생각했다고 말했지요. 당신 역시 미술을 업 삼아 달려온 사람이니 조금 더 기대가 컸을 지도요. 실제로도 제법 오랜 시간 나는 미술을 나의 업으로 삼았고요. 색을 다루는 업이 운명이 아니었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나는 붓을 내려놨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지만, 여전히 마음이 지치면 색을 찾아 헤매고 있어요. 책을 읽고, 전시회를 찾고, 야경을 가만히 응시하며 지친 마음을 달래요. 나는 어쩌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던 색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을지도요. 오늘도 나는 자꾸만 내 눈을 가득 채우는 빛과 색이 그립습니다.     



 어쩌면 색에 강하게 이끌려 나의 마음이 쉬어감을 느낀 것은 앞으로 펼쳐질 내 생의 서막이었을지도. 그대가 내게 선물했던 미술과 나의 지독한 애증의 관계는 그렇게 나의 첫 기억에서부터 시작되었나 봅니다. 부단히도 벗어나려 애썼고 결국 모든 것을 망가뜨린 다음에야 나는 그것에게서 벗어났지만, 결국 삶이 고단해 쓰러질 것만 같을 때마다 엉금엉금 색을 향해 돌아오는 굴레에 빠져버렸어요.



 그림은 오래도록 제게 벗어나고 싶은 존재였으나, 참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 대신 이제는 내가 그려 나가는 내 생을 살아보려 해요. 당신이 내게 미술을 가르쳐주고 선물해주셨으니, 나는 이제 그 색연필로 내 생을 그리고 채워나가렵니다. 그 정도라면 미술도 조금은 할만한 것 같아요. 크게 무너지는 나를 보며 속 끓였던 당신, 이제는 그저 응원하며 지켜봐 주시길. 내가 꼭 쥐고 다닌 색연필들로 어떤 생을 그려나가는 지를 말이에요

이전 01화 [프롤로그] 결국, 인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