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에게
성공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내 생각은 그날에 멈춰 나아가질 않아. 그날은 내게 분명한 성공이었으나 경쟁에 밀린 너에게는 지독한 실패의 날이었다. 성공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를 세상이 내게 서늘하게 알려준 날이기도 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날밖에는 떠오르지 않아.
우리는 같은 학원에서 같은 학교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었어.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지. 서로를 시기하며 경쟁하기엔 우린 아직 어려서 그저 친구가 좋았고, 원생의 수에 비해 학교의 입학정원이 훨씬 컸으니 굳이 미워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달까. ‘너보다 잘하는 것’보다는 ‘다 같이 합격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우리는 경쟁자라기보단 하나의 팀처럼 느껴왔으니까. 힘든 입시의 시기를 동고동락하며 견뎌온 팀 말이야. 난 그랬는데, 넌 그랬을까.
그 학교만의 특색있는 교복 색이었던 노란빛의 갈색을 가리켜 우리는 ‘똥색’이라 지칭하며 매일 같이 말했다. 똥색 입으러 가자, 라고. 지금에서야 예쁘게 포장된 지난날의 기억들이지만, 사실 입시를 준비한 그 시기는 지독하게 고단했던 시기였다.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도 다신 그렇게 치열할 자신이 없을 만큼이나 말이야. 이렇게 노력하는 만큼 그 결과도 따라와 주리라 믿으며 애써 나의 피곤을 설렘으로 덮으려 했던 나날들.
첫 번째 시험 날이었다. 필기시험을 보는 날이었지. 비중은 적었지만, 공부를 제법 잘했던 나라서 실기보다도 자신 있었어. 말로만 듣던 붉은 벽돌 담장을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했지. 나는 이곳에 다닐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보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
그런데 그날. 나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필기시험을 형편없이 망쳐버리고 교문 밖을 벗어나면서 서럽게 울어버렸어. 애초에 풀지 못할 문제였다면 아쉽지나 않았을 텐데 그게 아니어서 분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회를 놓친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돼 서러웠어.
그러자 널 기다리던 너희 어머니께서 날 우는 날 발견하시고는 내 상황을 단박에 알아차리시더라. 날 애써 다독이시고 좋은 말들로 위로해주셨어. 물론 자기 딸과 비슷한 아이라서 그런지 약간의 진심도 섞여 있었지만,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그 위로가 내 마음에 크게 와닿진 않았다. 아무리 어려도 그 정도는 느낄 수 있는 법이라서. 아마 아직 나오지 않았을 네 시험 결과에 더 초조해지셨을지도 모르지.
너는 별탈 없이 필기시험을 치렀던 걸로 알아. 네 어머니의 위로가 묘하게 불편했던 그 이유를 난 집에 가서야 알았어. 너희 어머니는 바빠서 오지 못하셨던 우리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어쩌면 좋냐며 내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더라고. 이쯤 되니 너도 이해했을까. 그래, 너희 어머니에게 나는 그저 경쟁자인 아이였던 거지.
하지만 두 번째 시험 날. 실기시험에서 나는 날아올랐어. 합격자 발표날 단번에 붙었으니 아마 첫날의 실수들은 둘째 날 만회한 것이었겠지. 자신 있게 그림을 그려냈던 것이 사실이야. 공부를 더 잘하는 나지만, 학원에서도 그림을 그릴 때마다 1, 2위를 다투곤 했던 나잖아. 제법 어려운 정물이 주어졌지만, 침착하게 그려냈던 기억이 나.
대신 그 명단에 너의 이름은 없었다. 네가 우리 학원의 유일한 불합격은 아니었으나 너와 나의 처지가 뒤바뀐듯해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애써 달콤한 위로들 사이에 살풋 보였던 너희 어머니의 미소가 떠오를 때마다, 어쩌면 나는 너에게 위로를 할 자격이 없단 생각마저 들었다. 내게도 그런 미소가 묻어날지 모르니까.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느낀 첫 성공이었어. 치열한 의자놀이 끝에 남을 밀어내고 차지한 씁쓸한 승리자. 그 이후로도 나와 함께 경쟁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기가 참 어려워졌다. 내가 아무리 아쉽고 마음이 아파도,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승리의 기쁨이 상대를 위로하는 내게 묻어날까봐.
앞으로의 내 길에는 동료보다는 경쟁자가 더 많으리라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어려웠어. 그저 벽을 치고 사람들을 경쟁자로만 바라보기에 나는 사람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거든. 나는 홀로 멀리 가는 사람보다는 함께 오래 가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었거든. 남들과 조금 다르게, 뒤쳐지는 듯한 모양새로 비춰질 일이 두려워 고민하긴 했지만.
K, 나는 결국 조금 느리게, 멀리 나아가기로 했어. 지금의 너는 어쩌면 이미 나보다 저만치 앞에서 네 길을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세상의 의자놀이에서 탈락한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너도 지금쯤은 알고 있겠지. 세상의 성공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난 느리지만, 성공해 나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너도 그런 삶을 살고 있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