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에게
2011년의 크리스마스였다. 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조금은 떨어진 곳에 있었어. 그런데 날이 어찌나 춥던지, 보통은 4시 전후까지도 인파로 바글거려야 할 행사가, 그날따라 이제 막 정오를 지나고 있는데도 행사장 근처가 한산하다 못해 썰렁할 정도였거든. 크리스마스날 북적이는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는 건 몹시도 아쉬웠지만, 우리도 더 있다가는 뼛속까지 얼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만 접고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었어.
함께 간 지인과 무얼하면서 마저 시간을 보낼까 의논을 하다 일단은 번화가로 돌아가 노래방이라도 갈까 하는 말이 나왔어. 그런데 그전까진 관심도 두지 않았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노래방이 좋아 일주일에 노래방을 여덟 번씩 간다고 말했던 그. 하지만 나의 무심함에 그의 번호조차 물어보질 않았던 탓에 그에게 직접 연락할 방법 따윈 내겐 없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그 사람이 보고 싶었어. 아주 맹목적으로 말이야.
사람이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도 이어지는구나 싶었어. 관심이 없다가도 만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처럼 강하게 떠오르고 말이야. 아무튼 난 평소답지 않은 강한 이끌림에 어떻게든 그를 찾아내 연락하기로 마음먹었지.
그래서 그 사람에게 연락할 유일한 방법이 뭐였는지 알아? 그게 바로 R, 너였어. 그 모임에서 분명 그는 너의 십년지기 친구로 소개되어 참여했었잖아. 그 사람을 부르자고 네게 대뜸 연락해서는 말을 전해달라 하기도 뭐하고. 참 고민이 많았다. 평소에 너에게 잘 연락도 하지 않는 내가 다른 사람 찾는답시고 연락을 하는 일이 조금 멋쩍기도 하고.
그래서 결국 널 부르기 위해 연락한 시늉을 했어. 같이 노래방 가지 않겠냐고 말이야. 그러면서 넌지시 괜찮다면 그 사람도 데리고 오라고. 그 사람도 노래방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었냐고 옆구릴 쿡쿡 찔렀더랬지. 다행히 넌 별생각 없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해줬지.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그 사람만큼은 한눈에 보이는 거 있지.
가뜩이나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이제 고작 두 번째 만나는 그 사람의 얼굴은 어두운 저녁 저 멀리서도 눈에 박히더라고.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상대방에게서 후광이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하잖아. 그 순간의 내가 그랬어. 어두운 저 멀리서 그 사람만은 밝게 보이고, 내 머릿 속에선 사이렌이 울려버리는.
그렇게 그 사람을 만나버리고야 말았어, 나는. 시리도록 추웠던 겨울날, 나의 가장 뜨거웠던 시간도 함께 시작되었던 거야. 그리고 그 사랑이 내 인생에 이토록 긴긴 겨울을 열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난 그저 이 사람만큼은 지켜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느냐고 묻는 말에, 용기를 내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말 걸 그랬어. 그랬다면 그 사람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지켜낼 수 있었을까. 그때도 지금도 나의 생은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내고자 살아가는 시간인데, 그때도 지금도 그건 참 어렵다. 나는 여전히 겨울이 끝나지 않았는데, 과연 그 사람의 계절은 다시 시작되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있을까.
내가 굳이 그 사람의 이야기만을 주구장창 늘어놓으면서 R, 너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네게 가졌던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함이야. 변명이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난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으니까. 오히려 나는 그날의 노래방에서 네가 ‘눈의 꽃’을 부를 때, 오랜 친구만이 보일 수 있는 그의 호응들에 깊이 질투했어. 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너와 그만의 시간들이 내게 뼈저리게 느껴졌거든.
그때 그냥 마음을 접을 걸 그랬다. 서로의 인연이 시리도록 차갑다가 힘없이 녹아버릴 눈의 꽃이 되어버릴 줄 알았다면. 난 무엇을 그리도 욕심내다가 겨울 속에 영영 갇혀버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