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9
오래 사용해서 낡는 것보다, 쓰지 않고 두었던 물건이 어느 날 먼저 허물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그럴 때는 이상하게도 닳음보다 더 큰 허전함이 남는다. 인조가죽은 주인의 손길이 닿았든 닿지 않았든 시간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조용히 갈라지고, 끝내는 가루가 되어 스스로를 놓아버린다.
이번에 맡겨진 두 권의 성경이 그랬다. 부부가 결혼식 날 선물로 받았던 책이라고 했다. 한동안 서랍 한구석에 놓여 있던 성경은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꺼내보는 순간 이미 시간이 지나간 흔적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삭아버린 표지를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그 아래의 상태가 드러났다. 갈라진 곳을 다시 붙잡아야 했고, 제 역할을 잃은 꽃천과 가름끈도 새로 바꾸어야 했다.
나는 먼저 책의 뼈대를 다시 세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겉을 새로 입히는 것보다, 오래 버틸 수 있는 중심을 만드는 일이 먼저였다. 손을 거의 타지 않아 속지는 아직 빳빳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오래 펼쳐 읽혀 닳은 책과는 다른 시간의 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뼈대 위에서 다시 자리를 잡은 종이들은, 그제야 조금씩 안정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새 표지는 올리브 그린 미네르바 복스로 만들었다. 차분하고 부드럽지만 중심있는 가죽이다. 이제 이 성경은 더 이상 스스로 부스러질 걱정 없이, 부부의 곁에서 함께 시간을 견뎌갈 것이다. 지퍼를 닫을 때마다 짧고 묵직한 마찰음이 났다. 나는 그 소리가 어쩐지 오래 보관해온 기억을 다시 제자리로 넣어두는 소리처럼 들렸다.
결혼식 날 처음 건네졌던 두 권의 책이, 이제는 조금 더 단단한 모습으로 그 시간을 이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