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23. 2024
마침내 엽떡과 탕후루 콤보로도 견디기 힘든 순간이 왔다. 하루를 버티기 위해 투입한 자극적인 것들은 나를 잠깐 위로하는 듯하다 다음 날이면 더 짓궂게 괴롭히고 무너뜨렸다. 그래도 끊기 어려웠다. 아마 나는 그것들이 안겨주는 통증에 가까운 자극으로 혀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얼얼하게 마비시키고 싶었나 보다.
그때 나는 아침에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고, 낮에는 과다주입한 열정으로 발작적으로 일했고(그러면서 성공을 향해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고), 저녁이 되면 오징어만 쏙 빠져나온 오징어튀김옷처럼 흐물흐물한 밤을 보냈다.
내게 직장인의 삶이란 일 할 때에 내 속의 자원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쓰고, 쉴 때에 다시 채워 넣는 작업의 반복이었다. 이 작업은 한동안 꽤 즐거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마음속 곳간을 채우는 일조차 피로하게 느껴졌을 때, 그래서 삶의 밸런스를 유지하던 것들을 하나 둘 놓치기 시작했을 때, 내 안의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몸에 다양한 시그널이 나타났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잠도 푹 들지 않았다. 그런 스스로를 인지하며 예민해졌다. 손에 잡히지 않고 징후로만 떠도는 이 증상들이 거슬려서 견디기 어려웠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몸. 그럴 리 없지만 바스러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몸에 이상 증상이 나타났고 지금 멈춰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고민은 오래됐지만 결정은 순간이었다. 나는 어디로 꺾을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누군가 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에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겠지만, 사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다만 힘듦은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사태라, 나도 내 고난의 원인을 뚜렷하게 진단하기 어렵다. 단지 그때에는 그러했다고 말할 따름이다.
나는 내가 내린 선택의 이유를 꽤 오래 설명하기 어려웠다. 일단은 내밀한 부분을 까발리는 것이 힘들었고, 그렇다고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기도 곤란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모호한 태도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리라는 점은 짐작했다. 하지만 그런 연유로 나를 오해한다면 애정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굳이 에너지를 써가며 해명하고 싶지 않았고, 반대로 애정 있는 이들은 알 수 없는 나를 그 상태 그대로 존중해 줄 것이므로 약간은 안심이 됐다. 사실 나는 그저 가까운 과거가 아직도 따끔거려, 그 시간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으로부터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선택 이후에 찾아온 시간과, 그때에 내 안에서 일어난 상념에 대해 쓰는 일만큼은 좋았다. 그래서 생각이 날 때마다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짐을 내려놓아도 여전히 뻐근한 어깨와, 불현듯 찾아드는 불안과, 이따금씩 스며드는 안도감에 대하여. 그렇게 까만 바닷속을 떠돌다가 가끔 수면 위를 쳐다보며 예전의 삶을 생각하는, 양서류의 일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