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pr 02. 2022
썸을 타거나 연애를 할 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네가 좋아.
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먼저 고백하는 것은, 자존심을 한 움큼 내려놓는 일이자, 감정적으로 벌거벗는 일이다. 그 부끄러움을 견디고서야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난 것들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연인 간에도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이고이 마음을 전달했을 때, 상대가 소중히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혹시나 딴청을 피우면 어떻게 하지? 대답을 하긴 하는데, 나만큼 뜨겁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 후에 몰아질 민망함과 가슴에 새겨질 따끔한 상처는 어떻게 하나. 이런저런 생각에 수시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은 아껴두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이들 중에 상당수는 사실 이 단계에서 지레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거절에 대한 본능적인, 자연스러운 공포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깊은 마음을 누르고 눌러, 아주 조그맣게 만들어 던지기도 한다. 최대한 장난스럽게 툭. 별 일 아니라는 듯, 거절당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사랑해^^ (너는?)
맞다. 이미 사귀고 있는 연인 간에도 섬세한 '간보기'와 따끔한 '거절'은 수시로 일어난다.
연인 간에도 이러하니, 썸을 타는 사이에서는 더 심하다.
절대 먼저 말할 수 없지.
만약 거절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에는 가오도 상하고, 불명예스러운 레코드도 남겨진다. 쟤가 쟤한테 고백했다가 까였대.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투명하게 고백하는 대신, 조금 불투명해도 안전한 방식을 택하게 된다.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티 내지만, 결정적인 말은 남기지 않는다. 고백은 하지 않으면서, 냄새를 풍긴다.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로 호감을 전달하되, 거절당했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둔다. 아아, 당연히 장난이지. 너 지금 설마 설렌거야? 가끔 역공도 하면서.
이런 기술에 걸려드는 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설렘과 괴로움 사이.
이런 기술들을 유독 기가 막히게 잘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손해보지 않으면서, 상대를 설레게 만들면서, 아주 안전하게 한 발 한 발 관계를 진전시키는. 연애 기술의 장인들.
하지만 간혹 이런 기술을 모조리 무시한 채, 투박하게 제 갈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썸이든 연애든, 관계의 단계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뒷 일은 나도 모르겠다는 듯.
왜 전화했는지, 왜 불렀는지, 왜 만나자 했는지. 지금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어떤지 솔직하고 투명하게 말하는 사람들. 나중에 찾아올지 모를 손해를 감수하며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서, 상대의 불안을 덜어주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이건 마치 눈치 싸움이 바쁘게 오가는 전장에 나타나, 아무렇지 않은 듯 칼을 휙휙 휘두르고 쿨하게 떠나는 무사 같다고 해야 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에 마음을 내보이는 사람들이 부족해진다.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미 상처를 경험한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와중에 가끔 저런 무사들을 보면 놀라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맞은 듯 기분이 상쾌해진다. 편안하고 가뿐하다. 그리고 그 단순한 행동이 얼마나 넉넉한 마음을 필요로 하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내게 저런 사람들은 어떤 재력을 가진 사람보다도 더 넉넉하고 여유있는 사람이라 느껴진다. 그 솔직함과 자신감과 여유로움.
그런 모습이 참 매력적이다.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