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국 군대의 폭력을 날카롭게 다룬 명작<용서받지 못한 자>(2005)로 장편 데뷔를 했다.
이 작품에서 하정우는 연기력 좋은 배우로 눈도장을 찍는다. 특히 "그러면 도와줄 수가 없어"라는 대사가 유명한데, 이때 하정우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좋은 의미로) 눈에 똘끼가 가득하고 반짝반짝 빛이 난다. 감독인 윤종빈이 배우로 출연하는데 생각보다 연기가 괜찮아서 재밌다. 그가 데뷔 시절부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포착하는데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작품.
<비스티 보이즈> 포스터
군대 문제를 차갑게 응시하던 윤종빈은, 놀랍게도 다음 작품으로 호스트에 관한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비스티 보이즈>(2008)다. 무겁게 사회 비판을 하던 분이 화려한 유흥계에 대한 얘기를 하니 놀라울 수밖에.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윤종빈의 관심사는 줄곧 '수컷들의 무리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결같이 수컷들이 충돌하는 전장을 부지런히 찾아다닌다. 군대, 호스트바 등으로 전쟁터가 달라질 따름이다.
피 흘리는 남자들을 포착하는 윤종빈의 실력은 꽤나 좋다. 두 작품을 연달아 내며 윤종빈은 내게 까방권을 얻었다. 이때 윤종빈과 이경미(<미스 홍당무>, <보건교사 안은영> 연출)가 한국의 넥스트 제너레이션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던 둘이 지금은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를 하고 있으니, 참 사람 일 알 수가 없네.
이 작품에서 하정우의 연기는 정말 양아치가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의심마저 하게 만든다. 굉장히 찰지다(인간에게 환멸을 느끼고 싶으면 '발리 구두' 장면을 보시라). 또 윤계상이 배우 선언을 하고 나서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작품으로 기억한다. 윤진서의 연기도 눈에 띈다. 특유의 나른하고 몽환적인 느낌으로 '지원' 역할을 완벽히 소화한다. 연기력이 아주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끔 배우와 작품의 만남은 이런 신기한 스파크를 만들어낸다. 그런 순간들과 마주하는 것은 영화를 보는 기쁨 중 하나겠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스틸컷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로 공전의 히트를 친다.
지금 찾아보니 관객수는 472만 밖에 안되네. 하지만 무수히 남긴 명대사, 양산된 패러디를 생각하면 이 작품의 파급력은 천만 영화 이상이다(심지어 OST까지!).
특히 최익현(최민식)의 대사들은 다 언급하기 입이 아플 정도다.
물론 최민식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그 대사가 포착한 한국 특유의 정서가 모두의 공감을 자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너거 서장이랑, 뭐도 했고, 뭐도 했고, 다했어 임뫄!!!" 같은 대사는 구린 짬짬이로 일이 굴러가던 시절의 한심함을 유쾌하게 조소한다. 서장과 고작 사우나를 했다는 사실이 벼슬이 되고, 공권력이 로비스트에게 고개를 조아리던 시절. 우리가 이 대사에 환호하는 이유는, 그 시대의 습한 공기를 함께 흡입하며 커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윤종빈의 특기다. 권력, 욕망을 둘러싼 남자들의 암투를 비스듬히 지켜보며 킥킥대는 것 말이다.
<군도:민란의 시대> 스틸컷
그걸 생각한다면 <군도:민란의 시대>(2014)가 어째서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은 관객수 477만으로 나쁘지 않은 흥행을 올렸다. (머리 풀어헤친 강동원의 미모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외계+인>과 비슷하게 감독 특유의 정서가 옅어진 오락물로 받아들여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시대극을 시도했는데 이건 윤종빈의 특기가 아니다. 그는 동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장기인 감독인데, 시대가 달라지다 보니 그 날카로움이 무뎌졌다. 처음 장르물을 시도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으나 그냥저냥이었다.
만일 윤종빈이 다시 시대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그 시대의 구조적인 통증을 날카롭고 세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그런 다음 그 시대와 지금의 공통된 정서를 추출해 영화에 생생하게 펼쳐낸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군도>는 미장센이 좋았으나 윤종빈 치고 너무 둔탁했다.
<공작> 스틸컷
<공작>(2018)에서 1990년대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싼 남북의 긴장을 다뤘다.
윤종빈 특유의 유쾌함이 절제되고, 차분한 스파이물의 느낌이 강해졌다. 개인적으로 윤종빈의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내게 <군도>는 윤종빈의 외도이지만 <공작>은 발전이다. 이성민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결론의 마무리가 교과서적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수리남> 스틸컷
그랬던 윤종빈이 이번에는 넷플릭스에서 <수리남>으로 돌아왔다.
부패한 시대, 구조적 병폐, 욕망 가득한 수컷들의 전쟁. 좋아했던 것들로 다시 저글링을 하려 한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유쾌함을 다시 들고 나타난 점도 반갑다.
아무래도 넷플릭스와의 첫만남에서, 무리한 시도를 하기보다는 본인의 장기를 다시 선보이려는 것 같다(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큰 재미는 못 봤으니 좋은 전략이다). 개인적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차가움을 더 선호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담았던 유쾌함을 다시 접하게 되어 반갑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윤종빈의 모습이기도 하고.
2화까지 봤는데 꽤 흥미로워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회차 별로 리뷰를 써보려고 한다. 사실 <수리남> 하나로 이렇게 글을 많이 올릴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땡겨서 쓰다 보니 거의 홍보담당자 수준이라 약간 현타가 온다. 아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