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읽기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가능하면 영화 관람 후 읽어주세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과 관련하여
1. 키워드로 읽기 '태초의 결합'
2. 키워드로 읽기 '색의 의미'
3. 키워드로 읽기 '언어의 실패'
4. 비평
순으로 포스팅될 예정입니다.
키워드로 읽기 3. 언어의 실패
주인공 엘라이자는 들을 수 있지만 말을 하진 못하므로, 영화에는 언어를 대신하여 감정을 전달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등장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수화가 있고, 손에 대응하는 발의 소리인 탭댄스가 있고, 음악과 춤, 그리고 티비의 영상이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영화에 이른다.
엘라이자와 자일스는 이미 익숙한 듯 서로 발을 구르며 소리를 맞추고, 젤다는 누가 가르쳐주기라도 한 듯 엘라이자의 수화를 알아듣는다. 비록 언어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그들은 아무런 무리 없이 엘라이자와 소통한다. 엘라이자와 어인(괴생물체)이 처음 만났을 때, 계란과 음악을 두고 수화를 건네며 조심스레 소통하는 모습은 영화의 가장 감동스러운 순간 중 하나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다르다. 그는 젤다보다 자신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고 믿으며, 아무리 바빠도 '프로토콜'을 따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모든 것에 위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가 말을 못 하는 것 역시 동정 혹은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가장 우월하며 이상적인 소통방식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형상을 맹신하므로 어인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며, 언어의 우월성을 내세우기에 엘라이자의 몸짓을 읽지 못한다. 우월함에 대한 믿음은 그를 고립시킨다.
스트릭랜드는 자주 "fuck"이란 욕설을 내뱉는다. 이것은 단순한 욕설을 넘어 자신의 지위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행위이다. 그는 예의 바른 말투를 사용할 필요도 없고 욕설을 내뱉을 수 있는 상위의 지위에 있다. 그러나 영화가 점차 진행되며 이 폭력의 언어들은 하나둘씩 스트릭랜드에게 되돌아온다. 그것은 인물들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과정과 시기를 같이 하는데, 이는 마치 위에서 아래로 굴러간 돌멩이가 아래의 땅이 높아지자 다시 역방향으로 굴러가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호프스테들러 박사는 스트릭랜드를 향하여 '프로토콜'대로 하라고 요구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스트릭랜드는 어인에게 공격당하고서 "맙소사 너는 정말 신이구나"라고 말한다. 이는 스트릭랜드가 한때 조롱한 언어들(원주민들은 "저 자식을 신이라"고 한답니다)의 귀환인 동시에, 함부로 멸시한 말에 의한 단죄의 순간이다. (한편 호프스테들러 박사는 미국어와 러시아어를 동시에 사용하며 스파이 활동을 한다. 이는 박사가 주인공들에 우호적인 캐릭터임에도 입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 이유가 된다. 교묘한 이중언어 사용은 영화적 처벌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영화에서 비언어가 언어를 압도하는 장면이 있다.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와 젤다에게 어인에 대하여 묻는다. 그는 예와 다름없이 그들을 멸시하는 언어를 쏟아내며("고작 청소부들을 데리고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만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때 엘라이자는 꼿꼿하게 머리를 세우고 수화로 욕을 한다. 이때 그녀가 하는 욕은 "fuck you"다. 그런데 엘라이자가 하필이면 이 욕을 하는 이유는 그 직전에 스트릭랜드가 혼자서 "fuck"이란 욕을 뇌까리기 때문이다. 이 즈음에 엘라이자는 자신이 부족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녀는 더 이상 폭력의 언어를 참지 않고 그대로 그에게 "f.u.c.k.y.o.u."라고 돌려준다(이 장면의 욕이 "지랄하지 마세요"라고 번역되어 이런 맥락을 살리지 못한 점은 약간 아쉽다).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돌려받았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무슨 뜻이냐고 되묻지만 결코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엘라이자의 표정은 당당하며 평온하다. 언어가 맥을 추리지 못하고 좌절당하는 순간이며 비언어가 언어를 압도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언어와 관련된 결정적 장면이라면 역시 이 장면을 꼽고 싶다. 그것은 엘라이자가 자일스에게 어인을 구하러 가자고 설득하던 장면이다. 자일스의 무시에 화가 난 엘라이자는 자일스에게 자신의 수화를 말로 옮기라고 한다. 엘라이자는 자신과 어인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장면에서 그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이를 왕복하는 언어와 비언어의 충돌이다. 엘라이자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울먹이며 수화를 이어간다. 그러나 이를 말로 옮기는 자일스의 언어는 무심하고 딱딱하며, 되려 귀찮다는 느낌이 넘쳐난다. 엘라이자의 몸짓은 결코 자일스의 말로 변환되지 못하며 그들 가운데서 길을 잃는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실패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언어는 스트릭랜드가 생각하듯 다른 것을 포괄하는 우월한 수단이 아니란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엘라이자가 구사하는 수화는 그 자체로 완전하며 결코 언어로 구현될 수 없다. 자일스가 수화를 말로 옮기는 과정은 불완전해서 답답하며, 그 무심한 변환 과정에서 일말의 폭력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실패가 엘라이자와 어인의 몸짓을 더욱 아름답고 완전하게 만든다.
엘라이자는 어인을 향하여 "그대는 모를 거예요. 내가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지"라고 노래하지만, 이것은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방식으로 전달될 수 없기에 우리는 노래로, 춤으로, 영화라는 빛으로 그것을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길예르모 델 토로가 영화를 만드는 계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영화를 언어로 변환할 수 없고,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경유하지 않고서 그들의 사랑을 알 수 없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어떠한 언어도 부재하는 곳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을 조용히 목도하게 만든다. 그 찬란한 영화적 순간은 언어를 압도하고 우리를 즉각적으로 설득시킨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언어가 권위를 잃고 철저하게 실패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길예르모 델 토로는 영화와 사랑의 의미를 재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