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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Feb 18. 2023

② 직선적인 스토리, 전통적인 가치관

왜 그럴 때가 있지 않나. 탁자에 둔 찻잔의 물이 차라락 떨리는 것을 보았을 때. 땅이 흔들리고 있음을, 지진이 일어남을 알려주는 지표. 내가 느낀 감각이 헛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만드는 작지만 확실한 증거.


최근 극장가에도 지각 변동을 느끼게 하는 '떨리는 찻잔'이 있었으니, 지난해 개봉했던 <외계+인>와 <비상선언>이다. 흥행몰이를 할 것이라 예상했던 <외계+인>은 관객수 160만에 그쳤고 <비상선언>은 209만이 들었다. 두 영화의 흥행 패는 본격적으로 '대체 왜?'라는 물음을 영화계에서 자아냈다.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나친 악평' 문이라는 것이다. 이들 대답은 맞고 틀림을 떠나, 영화의 내용과 유통의 측면 만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에 대한 분석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관객의 성향'은 시대와 시절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평소에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관객성이라는 것이 큰 틀에서는 변함이 없고,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변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떨리고 진동하다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버린 건물처럼,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확실한 변화가 어느 날 갑자기 극장가에 찾아왔다. 관객들의 성향 변화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임계점이 바로 2022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관객성의 변화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직선적인 스토리',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영화들에 대한 선호.


영화 <외계+인>과 <비상선언>의 스틸컷


앞서 했던 얘기로 돌아가보자.

<외계+인>과 <비상선언>은 어째서 흥행하지 못했나. 원인이야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내게는 두 영화의 복잡한 스토리가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온다. 세계관을 소개하는데 집중한 <외계+인>이나 여러 번의 반전을 시도하는 <비상선언> 모두 '펼쳐지는 스토리'에 가깝다. 이야기가 단순하고 직선적인 대신, 여러 번 구부러지고 잔가지도 많다. 관객에 따라 "복잡하다" 또는 "어렵다"라고 느낄 수 있다.


2022년 흥행한 영화들을 한번 살펴보자.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1. <범죄도시2> 관객수 1313만

2. <아바타: 물의 길> 〃 903만

3. <탑건: 매버릭> 〃 879만

4. <한산: 용의 출현> 〃 737만

5. <공조2: 인터내셔날> 〃 709만


대부분의 영화가 직선적이고 굵직한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범죄도시2>와 <탑건: 매버릭>에서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 서브 플롯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잔가지가 많아도 중심이 되는 뼈대가 단순하고 탄탄해서 결말까지 관객을 무난하게 이끌고 간다는 뜻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같은 맥락에서 특히 인상 깊은 것이 최근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이다. 올해 1월 개봉한 이 영화는 조용히 돌풍을 일으키며 최근 관객수 300만을 넘었다. 만화 '슬램덩크'와 함께 성장했던 이들 사이에서 인기는 놀랍지 않으나, 놀라운 것은 그것을 처음 접하는 세대에서의 열풍이다. 사실 '슬램덩크'는 경쟁, 승부로 이뤄진 스포츠 만화의 고전이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각색이 됐다고 하나 형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의 모성 등 전형적이고도 전형적인 내러티브를 차용하고 있다. 게다가 영화의 만듦새가 훌륭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인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로 서술돼야 한다. 고전적이면서 전형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인기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인기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직선적인 이야기의 유행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일전에 쓴 글에서 "요즘 관객들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으며, 기대한 쾌감을 확실히 전달하는 작품을 선호한다(https://brunch.co.kr/@comeandplay/754)"고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탑건: 매버릭> 스틸컷

다음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의 부상에 대해 말할 수 있겠다.

지금의 관객들은 영웅이 시민을 지키거나(<범죄도시2>) 아버지가 가족을 지키고(<아바타: 물의 길>) 노련한 리더가 임무를 완수하는(<탑건: 매버릭>) 스토리에 열광한다. 나라를 지키는(<한산: 용의 출현>, <공조2: 인터내셔날>) 스토리도  수 없다. 이 방면에서 두각을 보여 온 윤제균 감독의 신작, <영웅>(2022)의 뜨뜻미지근 한 성적도 이런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안중근에 대한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 한 <영웅>은 납작한 연출 탓에 주인공의 애국심이 관객에게 충분히 전해지지 않은 케이스에 속한다. 오히려 (영화의 의도와 달리) 적국의 총리가 캐릭터의 측면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다. 여태 알던 역사와 다른 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태 사석에서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며 "보수적인 가치관(정치적 의미에서 보수가 아니라 기존의 가치를 지키려 한다는 의미에서 넓은 보수)을 수호하는 영화가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보수적이라기보다 '전통적'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직선적인 스토리'와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 영화들이 관객의 사랑을 받을 확률이 높아졌다. 다만 이것들이 흥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추가됐다는 뜻이지, 이 두 가지만 갖추면 무조건 흥행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 마치 돌고 도는 유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 유튜브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단순한 연출, 인간미가 느껴지는 영상들 '유튜브 감성'은 과거를 상기시킨다. 가정용 카메라가 출시되어 홈비디오가 유행하던 시절 말이다. 플랫폼의 발전이 영상 연출을 둘러싸고 시간을 오히려 뒤로 되돌려 놓았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최근 극장가에서 나타나는 관객성의 변화도 내게는 비슷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단순한 내러티브와 보수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고전 영화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영상도, 관객의 성향도 마치 패션처럼 돌고 도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았다. 이런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민망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복잡성을 싫어하는 시대가 된 것인가? 아니면 고전 영화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진 시기라 다시 유행이 도는 것인가?


이때 영화평론가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지루한 답은 "코로나, 전쟁, 경기 침체로 불안해진 관객들이 안전한 영화를 찾는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지금 세상에서 저 세 가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뭐가 있겠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너무 넓은 분석은 분석이 아니다.


나는 내가 짚은 관객성의 변화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 오래 고민하다 정리한 생각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 있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이 얘기는 의미 있는 분석을 할 수 있을 때 다시 꺼내보고 싶다. 다 같이 생각해 보았음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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