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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18. 2016

쉬운 사랑

별 것 없는 이야기

더 이상 세상에 없는 걸 사랑하긴 참 쉽다.

그건 이제 그것과 나의 이야기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이 혼자 가지고 있는 그것 혹은 그 사람과의 좋았던 결말만이 그간 우리의 모든 것이었다,라고 스스로 결론짓고는 일방적인 마무리를 하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이야기할 수 없는 대상을 뒤로한 채 스스로에게만 아름다운 해피엔딩. 

이처럼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이야기는 모든 걸 쉽게 만들어 버린다. 상대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만큼 거침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가 말했다. 

이미 죽은 배우를 자기는 참 좋아했었다고. 그만한 배우가 없었다고. 요즘에 나오는 배우들은 진짜 연기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다고. 그래서 그 배우의 죽음은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었다,라고 말이다.

분명 친구의 말에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그 배우가 살아있을 때 친구와 나는 그 배우가 주연한 영화를 함께 봤었다. 그리고 분명 그때 친구는 그 배우의 연기가 별로였다고 나에게 말했었다. 그래서 그 배우도 별로라고. 그러니까 친구가 이제 와서 그 배우가 좋다고 말하는 건 자신의 선택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때 연기가 별로여서 좋아하지 않았던 배우가 갑자기 좋아진 것에는 슬프게도 배우의 죽임이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친구의 눈에 별로였던 그 배우의 연기는 배우의 죽음으로서 면죄부를 얻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방적인 쉬운 사랑만을 뱉어내고 있는 친구가 속물 같아 보였다.

죽음은 때론 아름다운 결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살아온 삶이 어떠했든 죽음은 그런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우리에게 건넨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건너온, 마음을 잠기게 하는 미안함으로 그것을 자체를 미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게 잘못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슬프기까지 하다. 

왜 우리는 살아있을 때 더 사랑해주지 못했을까. 

왜 보듬어주지 못했을까. 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존재에게 쉬운 사랑을 건네며 스스로 있어 보이려 하는 걸까.

집에 돌아와 그녀가 주연했던 영화를 다시 봤다. 그녀의 연기는 괜찮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그녀의 눈엔 있었지만 그녀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린 당시 그 슬픔을 모른 척했었다.

더 이상 세상에 없는 걸 사랑하는 건 쉽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건 살아있을 때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있음은 그것 자체로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저는 120살까지 사는 게 목표입니다. 60살까지는 열심히 일을 하고 나머지 60년은 신나게 놀려고요. 그래서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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