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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Aug 02. 2017

정말이지 먹기 힘든 것

고수를 아시나요?

사실 나는 음식을 가려 먹지는 않는다. 

그게 무엇이든 배가 고프면 닥치는 대로 먹는 스타일이고, 또 배가 부르면 식사 시간(우리 엄마는 여전히 이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허기의 유무 따윈 무시한 채 정해진 식사시간엔 무조건 밥을 먹어야 하며 그것을 가족들에게도 강요하신다. 20여 년을 함께 지낸 엄마의 품을 벗어날 때 난 덤으로 정해진 식사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문제는 요즘 이 식사시간이 되면 밥은 먹었느냐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식사시간이라는 녀석은 여러모로 나에겐 꽤나 귀찮기도 하고 질긴 녀석이다)을 가볍게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니 나에게 음식이라는 건 단순히 내 몸에 필요한 에너지와 영양분을 충족시켜주는 존재일 뿐, 난 그것을 대단찮게 여긴다. 배가 고프면 말 그대로 그게 무엇이든 먹으면 그만이니까.

누군가와 정말 맛있다고 하는(그런 소문의 근원지는 도대체 어딘지 여전히 궁금할 뿐이지만) 음식점에 가서 누구나 정말 맛있다고 하는 음식을 먹을 때도 먹기 전에는‘이건 정말이지 맛있겠는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몇 입 먹고 나면 결국엔‘에이, 이것도 그다지 맛있진 않는데? 차라리 찬밥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먹는 게 낫겠군.’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은 정말 맛있다며 한 입 먹을 때마다 연신 음식의 사진을 찍어대지만 말이다.

스무 살이 시작될 무렵부터 나는 세계의 이곳저곳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처음 보는 낯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왜냐고? 허기가 졌으니까. 단순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뿐이다. 

음식이 정말 맛있어 보인다거나, 이 나라에 왔으면 그래도 이 음식은 꼭 먹어봐야 하지 않겠어? 따위의 동기는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유명한 음식들을 먹을 기회가 생기면 ‘흥’하고 콧방귀를 뀐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선택한 음식이 딱히 나를 거부하거나 내 몸에서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터라 나는 무수히 많은 음식들 앞에서 돼먹지 않은 태도를 취하며 건방을 떨었었다. 

정기적으로 하루에 두 번쯤 내 몸은 나에게 허기를 알려왔고 나는 그때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최대한 가까운 음식점을 찾아가 밥을 먹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야 여행에 있어서 음식은 나에겐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루에‘두 번’이라는 건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일상에서도 여행에서도 나는 간절했던 사람을 하루에 두 번 떠올리는 날이 많지는 않으니까.

한 번은 중국의 작은 시골마을을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허기가 졌었고 나는 복잡한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듯 달랐기 때문에 시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시골마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현지인들의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팔고 있었다. 그리고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허술하게 서있는 음식점들도 많았다. 

나는 처음 눈에 들어온 음식점에 들어가 기다란 의자에 앉고서는 국수를 한 그릇 주문했다. 중국어는 못했으므로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맛있게 먹고 있는 국수를 손으로 가리키며 나도 같은 것으로 하나 달라고 했다. 물론 말이 아닌 눈빛으로. 지금 생각해봐도 그 아주머니는 국수를 정말 맛있게 드셨다. 후루룩 쩝쩝. 옆에 있는 어린 딸이 울건 말건 말이다.


얼마 기다릴 것도 없이 내가 주문한 국수는 나왔다. 나는 허겁지겁 국수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수를 먹는 동안 이상한 향기가 내 코를 지나 뇌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내 뇌를 간질였다. 달리 뭐라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처음 경험해보는 묘한 향기에 난 그만 국수를 집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난 지금 배가 고팠고, 그러므로 그게 무슨 음식이건 낸 몸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도무지 더 이상은 국수를 먹을 수가 없었다. 내 몸에 요동치던 허기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뭐지?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국수를 먹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주인아주머니가 웃으시면서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손에 푸른 풀을 한 움큼 쥐어 나에게 건네신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그 푸른 풀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내 뇌를 간질이던 그 냄새는 바로 그 풀에서 나는 향기였다. 그리고 그 향기에 취해 정말이지 다시 한번 머리가 어질 해졌다.


그 풀은 고수였다. 향차이, 팍치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의 곳곳에 퍼져있는, 그들이 음식에 곧 잘 넣어 먹는 향신료로 쓰이는 향이 매우 강한 풀.

나는 왜 그 풀의 향을 견디지 못했을까? 뭔가 사람이 견디기 힘든 향이었을까? 하지만 내 옆의 아주머니는 매우 맛있게 국수를 먹고 계셨으므로 그건 아닐 것이다. 아니면 고수가 나에게만 묘한 마술을 걸어 ‘음식을 고작 배만 채우는 존재로만 생각하다니. 넌 누군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는 녀석이라고’라며 나를 혼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난 그 날, 그리고 그 후로 고수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한다. 

특히 아시아 지역을 여행할 때는 항상 “고수는 빼주세요”라는 말을 꼭 현지어로 외워 가곤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짜증스러운 일이다. 내가 음식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나에게도 잘못은 있다지만 고작 풀 몇 줄기가 음식의 맛을 결정해버리다니. 

‘이제부터라도 음식의 존재에 감사하며 정성스레 음식을 먹을 테니 나를 그만 괴롭히지?’라는 강경한 타협안을 고수에게 제안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고수가 못 이긴 척 이 제안을 받아줬으면 좋겠다. 

누구나 그런 음식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고작 풀떼기 하나 때문에,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난 한 없어 억울해지고 만다.

생각해보니 내 주위엔 먹지 못하는 음식을 꽤나 여럿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와 밥을 먹을 때면 음식점을 정하는 것부터 메뉴를 고르는 것  까지 여간 쉽지가 않다. 친구와의 만남은 즐겁지만 밥을 함께 먹을 생각만 하면 만남 전부터 나는 지치고 만다. 

친구는 그런 자신을 미안해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친구의 문제는 아니므로 친구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냥 그 친구는 나에게 고수 같은 존재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더 지치는 것이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문제를 껴안고 음식을 먹는다는 건 꽤나 피로한 일이니까. 그리고 이 피로감은 나에게 고수를 떠올리게 하므로 더더욱 싫다. 물론 이것 또한 내 문제이지 고수에겐 책임이 없다. 그냥 난 구시렁댈 뿐.


음식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손에서 탄생하는 그 순간 자신만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수가 가지고 있는 그 목적을 내가 제대로 눈치 채지 못했으므로 우리의 엇갈림은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름지기 사람도 그 사람만의 채취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누군가로부터 부정될 때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돌아서 버린다. 그것은 결국 채취의 문제라기보다는 반대편의 사람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고수를 거부하는 좀 더 명확하고 본질적인 이유를 찾기 전까지 고수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온전히 내 책임이다.



*고수가 어떻게 생긴 식물인지 아시나요? 사실 음식에 잘게 잘려 나오기 때문에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자세히 알고 있죠. 물어보신다면 그림도 그려줄 수 있습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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