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은 별을 삼킨다
별 것 없는 시간들은 그렇게 계속해서 멈추지 않은 채 꾸준하게 흘러갔다. 어쨌든 멈추지 않은 채 꾸준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시간에 대해서는 나는 나름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인정인 것이다. 나는 제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멈춰만 있는데 시간이라는 녀석은 “그래도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준 일을 해나가야 하지는 않겠어? 결과가 어떻든 말이야.”라고 말하며 약간의 후회와 아쉬움은 있을지라도 앞으로만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지난 삼일 동안 나는 열다섯 캔의 맥주를 마셨고(호가든 여덟 캔과 하이네켄 네 캔 그리고 아사히 세 캔), 정확히 다섯 끼의 식사를 했으며, 두 갑의 담배와 일곱 잔의 커피를 마셨다. 되짚에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만들어 내진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별반 다를 건 없다. 생존을 위한 행위를 생산으로 둔갑시키기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다.
출근길 나는 합정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합정역은 나의 출근길에 하나의 배경인 곳이다.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부터 마무리되는 금요일까지 정확히 하루에 두 번씩 합정역을 이용하고 있다. 합정역은 내가 큰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내 삶에서 사라지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배경이다.
열다섯 캔의 맥주와 다섯 끼의 식사와, 두 갑의 담배와, 일곱 잔의 커피로 보냈던 지난 삼 일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아침 출근길. 나는 문득 합정역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단순한 출근길의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합정역이었지만 바로 이곳에서 조금씩 내 삶이 달라지기 시작하지는 않았을까?
삶의 변화라는 건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항상 자신들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작은 배경 같은 것들이 모여서, 그것들이 의기투합해서 눈이 보이진 않을지 몰라도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의 맨 앞에 합정역이 있다고 말이다.
합정역은 적당한 시기가 되면(그걸 내가 알 수는 없을 테지만) 내 삶의 작은 것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두고 단상 위에 올라가서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연설을 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이 심심한 녀석의 삶에서 아주 작은 부분들입니다. 게다가 이 무심한 녀석은 종종 아니 자주 우리의 존재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젠 우리가 힘을 합하여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힘을 합해야 합니다. 혼자만의 힘으론 도무지 이 녀석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저는 여러분 작은 관심과 노력을 보여줄 것을 강력히 부탁드립니다.” 강단 있어 보이는 합정역의 연설이 끝나면 그 자리에 모여있던, 가령 여름이 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았던 나의 파란색 폴로셔츠와 한 번 사용하고는 부엌의 서랍장에 처박아 두었던 와인잔과 출판사의 판촉 행사에 받았던 멋진 문구들이 적혀있는 책갈피 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는 것이다. 그래 우리 힘을 합해서 이 녀석을 한번 변화시켜 보자고, 하면서. 그런 그들의 의기투합이 내 삶에 희형과 소리를 던져놓은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할 만큼 했으니 여기서부턴 네 몫이야. 어쨌든 우리는 네 삶의 배경일 뿐이고 네 삶을 살아가는 건 너 자신이니까 말이야. 이젠 제발 뭐라도 좀 해봐,라고 말한 뒤 다시 여느 때처럼 조용히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뭐 대충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합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아침엔 곧 교정 작업이 마무리될 희형의 책의 디자인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사실 이 회의엔 나는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 영역은 교정 부분이었고 책 디자인에 대한 회의는 디자이너와 마케팅 그리고 홍보 담당이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의실이 존재하는 않는 우리 사무실의 한가운데 넓은 테이블에서 하는 회의 내용이 자꾸만 내 귀에 들어었고, 회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있던 나를 디자이너가 에디터님도 와서 이야기 좀 해줘요. 도무지 이런 회의는 도무지 결론이 안 난다고요, 하면서 나를 불러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래도 파리 이야기인데 에펠탑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너무 진부해. 파리 하면 에펠탑이 바로 연상되긴 하지만 그건 너무 뻔하다고.”
“아니 그럼 피라미드라도 넣면 좀 색다른 가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고 좀처럼 의견은 좁혀지지가 않았다. 거기엔 분명 희형의 책임도 있었다. 그래도 책의 저자인데 디자인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라는 무책한 말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에디터님은 어때요? 그래도 책을 교정하고 있으니 책에 대한 뭔가 구체적인 이미지라는 게 그려지지 않아요?”
아무 말하지 않고 회의를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홍보 담당이 여직원이 물었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단단하게 묶은 당찬 여자다. 얼굴은 매우 순해 보였지만 일을 하는 걸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하나부터 열 까지 온전히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놓은 단계와 시간과 순서를 밟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일하기엔 상당히 피곤한 스타일이었지만 일을 꽤나 잘 했기 때문에 누가 함부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정말로 디자인이라는 부분엔 문외한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책의 내용이 중요하지 표지 디자인이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희형의 생각처럼 말이다.
“그래도 뭐라도 말 좀 해봐요.” 홍보 담당 여직원은 다시 한번 나에게 물었다.
“음... 사실 책이 파리가 배경이긴 하지만 내용은 뭐랄까... 그냥 삶에 관한 이야기니까. 조금은 무채색 배경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넣는 건 어때요? 그렇다고 우울해 보이진 않고 약간은 당당한 느낌으로.” 나는 테이블 위의 메모지를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그건 어쩌면 책에 대한 이미지라기 보단 내가 느끼는 희형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그것도 괜찮긴 하네요. 그래도 파리라는 이미지가 너무 아깝긴 해요. 요즘 유럽은 어디에 끼워 넣어도 잘 팔리는 핫 아이템이니까요. 거기다가 파리라면 더 말할 것도 없죠. 파리라는 이미지 만으로도 이 책은 꽤 잘 팔릴 거예요.”라고 마케팅 담당 직원이 말했다.
별다른 소득 없이 회의는 끝이 났다. 아직까지 출판 예정일은 조금 여유가 있었고 디자인이라는 게 한 번 이미지를 정하기만 하면 한 시간 만에도 끝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당장 급한 회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회의란 것이 무언가 결론을 이끌어내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조금 웃긴데? 내 책을 가지고 그렇게 까지 열을 올리며 회의를 했단 말이야? 고작 책의 표지 디자인 때문에?”
“"고작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으니까.”
“저번에 출판사 편집장님을 만났을 때도 이야기했었지만 난 디자인 같은 건 별로 신경 안 쓰는 걸.”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출판사의 일이라는 게 관습이라는 게 있는 거고 거기에 상당히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 뭐 그래도 난 당신의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야. 활자가 중요하지 이미지는 중요한 게 아니잖아. 책이라는 게 말이야.”
우리는 저녁으로 카레를 먹으며 오늘 출판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오늘 출판사에선 당신 때문에 꽤나 길게 회의를 했다고. 덕분에 나까지 말려들어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해버렸고 말이야,라고 카레를 한 입 입에 넣으며 대화를 시작했었다.
“맞아. 적어도 활자가 펼쳐놓은 세상이 한정된 이미지 안에 담긴 세상 보단 더 넓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고 당신 카레를 꽤 잘 만드는데? 상당히 맛있어. 이 김치도.” 그녀는 카레가 정말 맛있다는 듯 함박 웃으며 말했다.
“혼자 산 지 오래됐으니까. 카레는 그렇게 만들기 힘든 음식도 아니고. 한 번 만들어 놓으면 꽤 오래 먹을 수 있거든. 그래서 자주 만들어 먹어. 아, 그리고 김치는 사 온 거야. 꽤나 비싸게. 그러니까 반드시 맛있어야지.”
“나도 혼자 산 지 꽤 오래됐지만 요리를 못하는 걸. 파리에서 지낼 때는 하루에 두 끼는 밖에서 사 먹었어. 아침은 적당히 빵과 커피로 때우고 말이야.”
그녀는 여전히 내가 대단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카레가 훌륭한 요리라고 말하긴 힘들어.”
“당신의 세계에선 그럴지 모르겠지만 내 세상에선 당신의 카레 요리는 훌륭해. 정말로.”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당신도 한 번 요리를 해보는 게 어때?”
“귀찮아. 요리를 만든다는 거. 장을 보는 것도, 재료를 다듬는 것도, 뒤처리를 하는 것도. 그냥 내가 만든 요리보다 제대로 된 요리를 사 먹는 게 훨씬 더 좋은 걸. 이렇게 당신이 만들어 준 요리도 좋고.” 희형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요리를 해 줄 자신은 없지만 언젠가 정말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한 번 살게. 그렇고 싶어.”
“뭐 나야 좋지.”
요리를 하는 것도, 뒤처리를 하는 것도 희형은 귀찮아했기 때문에 결국 설거지는 내 몫이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부엌을 깔끔히 정리했다. 어지러웠던 부엌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건 중요하다. 한낱 그릇이라 하더라도 자신만의 몫이 있고 그것을 잘 해내고 난 뒤에 머물 수 있는 자신만의 자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내가 부엌을 정리하는 동안 희형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캔 하나를 꺼내서 거실로 갔다. 우리는 소파 위에 나란히 앉아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맥주를 마셨다.
희형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뭔가 자신에 관한 깊은 이야기가 진행되려 하면 적당히 웃으며 화제를 바꾸곤 했다. 그건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눈치채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녀와 지내는 내내 나는 일부러 그녀의 무언가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면 그녀의 책을 교정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녀를 알려고 일부러 노력을 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교정을 하는 건 내 몫이었으니까. 내가 희형을 자세히 알건 모르건 말이다.
“당신의 첫 기억은 뭐야?”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내가 옆에 앉아있던 희형에게 물었다.
“첫 기억이라니?”
“그러니까 당신이 기억하는 당신 삶의 첫 번째 기억 말이야. 가령 손에 잘 잡히지도 않은 커다란 우유팩을 집어 들려고 하다 그만 놓쳐서는 테이블 위에 우유를 쏟았다가 던 지, 당신을 안아 올리던 아버지의 굵은 팔뚝이라던지, 어린이 집의 재롱잔치에서 상을 받았다던지 뭐 그런 것도 아니면 창 밖으로 봤던 앞 집 오빠의 미소라던지.”
“글쎄… 그런데 그런 게 중요해?”
“중요하진 않지. 그냥 궁금해서. 난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나는 마지막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고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캔 꺼내어 왔다. 하나를 희형에게 건네고는 나머지 하나의 맥주캔을 땄다. 가져오는 길에 조금 흔들렸는지 거품이 뿜어져 나왔고 나는 황급히 입을 가져가 거품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
아무 말이라도 묻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가 그저 내 삶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배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로 그녀를 확인하고 싶었다.
“잠깐만…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해.” 희형은 손에 쥔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첫 번째 맥주캔을 살며시 흔들며 말했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그녀의 입에선 달달한 냄새가 났다.
“에펠탑에 갔었어. 내가 세 살 쯤이었나? 아빠랑 피크닉 도시락에 먹을 것을 한 가득 챙겨가지고 갔었지. 아침부터 아빠는 도시락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졌던 모습도 기억이나. 부엌은 위험하니까 들어오지 마렴, 하고 말씀하던 아빠의 뒷모습도 생각나고. 그렇게 도시락을 준비해서 우리는 한 껏 들뜬 기분으로 에펠탑에 갔었어. 아빠는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나는 예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 우리는 에펠탑 앞에 돗자리를 펴고 여유롭게 햇빛을 쬐었지. 난 얼마 전에 배운 영어노래를 아빠 앞에서 불러줬었어. 아빠는 내가 귀엽다며 나에게 사탕을 한 움큼 쥐어주셨던 것 같아. 이게 내 가장 첫 기억이야.”
“에펠탑? 첫 기억이 에펠탑이라니. 멋지네.” 나는 앞으로 흘러내리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내가 말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다. 그녀가 쓰는 샴푸 향기가 내 손을 타고 일렁인다. 그것들은 작은 입자가 되어 거실 안을 가득 메웠다. 머릿결이 잠시 움직인 것 만으르도 이렇게나 깊게 향기를 퍼뜨리다니. 그 향기들을 타고 나는 다시 희형의 원고를 교정할 때처럼 파리에 놓여있다. 에펠탑이 보이고 그 앞에 펼쳐져 있는 푸른 잔디밭이 눈에 들어온다. 가볍게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희형이 있다. 세 살배기 귀여운 희형이 잔디밭 위를 뛰어놀고 있다. 그리고 희형의 아버지는 선글라스를 낀 채 웃으며 희형을 바라보고 있다.
“난 어릴 때부터 파리에 살았으니까. 당신에게처럼 에펠탑은 나에게 신기한 곳은 아니야.”
희형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입은 흰 셔츠 속으로 그녀의 탄탄한 가슴이 보인다. 내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가슴이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핑크색 유두가 흐릿하게 보인다.
“그렇게 아빠와 함께 에펠탑 아래에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처음 보는 여자가 왔어. 그녀는 나의 세 번째 엄마가 되었지.” 별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다. 가볍게 툭.
“세 번째 엄마라니?”
“말 그대로 세 번째 엄마. 그게 내 첫 기억이고, 세 번째 엄마가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엄마야.”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세 명의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희형은 어릴 때부터 파리에 살았고, 세명의 엄마가 있고, 세 권의 책을 썼으며, 지금 내 옆에서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채 맥주를 마시고 있다.
“당신은?”
희형은 자신의 이야기는 다 끝났다는 듯 조금은 후련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이제는 당신 차례라고.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마, 라는 분위기다.
“나?”
“응. 당신의 첫 기억은 뭐냐고.”
희형은 얼굴을 내 가슴에 기대었다.
“당신의 에펠탑처럼 특별하진 않지만 어릴 때 아빠는 종종 나에게 창 밖의 구름 모양이 어떠냐고 물어보셨어. 지금 밖에 구름 모양이 어떠니?, 하고 말이야.”
“구름의 모양을 물어보셨다고? 왜?”
“글쎄… 어쩌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불편해서 그러셨을지도 몰라. 아버진 날 사랑하지 않으셨거든. 물론 나도 아버지를 사랑하진 않았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뭔가 복수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그건 나에겐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인정이었어.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할 수 없다, 라는. 어쨌든 아버지는 휴일에 거실에 나와 함께 있을 때면 나에게 구름의 모양을 물어보곤 하셨어. 구름이 얼마나 있는지. 모양은 어떤지. 색은 어떤지. 신물을 읽으시다가도 갑자기 날 불러서는, 얘야 창문 밖으로 구름모양을 한 번 살펴볼래? 이런 식이었지.”
“재밌네. 구름 모양을 살피라는 게. 그런데 구름이 모양이 있나?”
희형은 그렇게 묻고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아마도 구름 모양을 그려보는 것 같았다.
“구름은 계속해서 움직여. 그리고 어떨 때는 갑자기 색을 바꾸기도 하지. 그래서 정확하게 어떤 모양이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워. 색도 마찬가지고.” 나는 평생 구름을 관찰하는 기상학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아빠가 그렇게 나에게 물어보시면 나는 벌떡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갔지. 우리 집 거실의 베란다에는 커다란 창이 었었거든. 거기서 보면 구름이 잘 보였어. 나는 작은 눈을 몇 깜박거리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베란다의 창틀을 잡은 채 구름의 모양을 살폈지. 그리곤 대답을 해. 솜사탕 같아요. 푸들의 뒷 머리 같아요. 하얀 쟁반 같아요. 그러면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잘했다,라고 하셨지. 내 첫 기억은 그거야. 창 밖으로 보였던 푸들 모양의 하얀 구름.”
“특이해. 구름의 모양을 살피는 걸 시키다니. 그래도 구름이 푸들 같아서 다행이야. 불도그이나 셰퍼드 같았다면 당신을 울었을지도 몰라.” 희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불도그도 셰퍼드도 무서워하지 않아. 자세히 보면 귀엽다고.”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어느새 두 번째 맥주를 다 마셨기 때문에 다시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맥주가 한 캔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일 퇴근길에 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희형에게 나눠마실래?라고 물었는데 희형은 괜찮다고 했다. 아직 마시던 맥주가 절반쯤 남아있다고.
“언제부턴가 아빠가 구름의 모양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면 나는 베란다로 뛰어 간뒤 구름은 보지도 않고 속으로 열을 센 뒤 구름의 모양이 이래요, 하고 대답을 했지. 그런데 아빠는 귀신 같이 내가 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는 걸 아셨어. 처음엔 신기하기도 해서 몇 번은 아빠를 시험해 봤었는데 아빠는 내가 진짜 구름을 살폈는지 아니면 살피지도 않고 대답을 했는지 알아맞히시더라고.” 나는 세 번째 맥주캔을 따면서 말했다.
“어떻게 아셨을까?”
“글쎄… 잘 모르겠어. 세상에 부모들은 자식의 모든 걸 알고 계시는 것 같아. 자식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그래? 난 아빠가 한 명, 엄마가 세 명이니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네 명이나 있는 거네.”
“그럴 수도 있겠네.”
“좋네. 세상에서 날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네 명이나 있으니까.” 그녀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아빠는 나에게 어떤 태도를 가르치려고 하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태도 같은 거 말이야.”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태도라... 뭔가 현명하신 것 같네.”
“그런가? 뭐 날 사랑하지 않으셨다는 걸 빼면 아빠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어. 그리고 난 아빠를 나름 이해했기 때문에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응. 그래서 당신이 지금처럼 성실한 건지도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난 사람 보는 눈이 꽤 있다고. 믿어도 좋아.”
“뭐 게으르다와 성실하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그래도 난 성실한 편이긴 해.”
“맞아. 그거면 충분해. 그런데 당신 아빠는 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당신이 오해하고 있는 거 아냐?”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빠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가 날 낳다가 죽었거든. 당신의 인생에서 절대적인 부분이 나 때문에 사라져 버렸으니 날 미워할 수밖에. 난 이해해.”
희형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한 명의 아빠와 세 명의 엄마가 있고, 나에겐 매일 구 룸의 모양을 물어보시던 날 사랑하지 않는 한 명의 아빠가 있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