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필요로 한다

보름달은 별을 삼킨다

by 최전호

아침 6시 30분, 핸드폰 알람이 정확히 두 번 울리자 나는 눈을 떴다. 어김없이 다가온 똑같은 아침이었고, 그간의 아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희형은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이불을 빠져나왔다. 거실의 커튼 사이로는 희미하게 아침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다. 아침이다.

또다시 아침은 온 것이다.

나는 종종 아침에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 하루 동안 과연 내가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까? 아니, 흔적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날 한 번쯤 생각해주는 그런 하루가 될까?라는 생각들.

햇빛이 비춘 거실에는 오늘을 확인시켜줄 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그 흔한 달력도 시계도 우리 집의 거실엔 없다. 일부러 사놓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 집에 시계와 달력이 없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난 그것들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슬프지만 내 삶은 의미 있는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기대하는 삶이 아니란 말이기도 하다. 시간과 날짜에는 기다림의 약속과 기대와 설렘이 있는데 내겐 그런 것이 없었으니까.

만약 해가 뜨지 않는다면 난 이 집에서 영영 밖에 나가지 않은 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이야 어떤 식으로든 흘러가겠지만 난 이 곳에서 영영 머물러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 그것이 불편함이나 슬픔을 동반하지 않고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커튼 사이로 번져오는 햇빛을 등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어쨌든 아침은 왔고, 난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아무리 특별할 것 없는 지루한 삶을 살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아무 연락 없이 무단으로 결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물을 한 컵 마신 뒤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면도 크림을 얼굴에 골고루 바르고 뜨거운 물에 담가 두었던 면도기로 면도를 한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옷장 문을 열고는 오늘 입을 옷을 꺼내어 입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옅은 파란색 셔츠. 색의 농도만 약간 다를 뿐 비슷한 면바지와 셔츠는 내일은 자신의 차례라는 듯 줄지어 옷장에 걸려있었다. 스킨과 로션을 얼굴에 바르고 폴 스미스 향수를 두 번 손목에 뿌렸다. 그리고 왼쪽 손목에 카시오 전자시계를 찬다. 시계를 잘 보진 않지만 이건 습관과도 같다. 있어도 그만이지만 없으면 약간 허전한. 머리는 드라이기로 말리지 않더라도 사무실에 도착할 때쯤이면 자연스레 마를 것이므로 적당히 손으로 만져 대강의 모양만 잡아두면 된다.

출근을 하는 평일에는 매일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일어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 뒤 머리를 감고 옷을 입는 것. 그리고 향수를 두 번 뿌리고 왼 손목에 시계를 차는 것으로 출근 준비는 마무리된다. 이런 일정한 행위의 반복은 나에게 상당한 안정감을 준다. 조금은 지루하지만 이러한 지루함이 반복되고 쌓이다 보면 그 일련의 행위들 위해서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잠에서 깨면 침대에서 부엌으로, 그리고 부엌에서 다시 화장실을 거쳐 작은 방의 옷장 앞으로 말이다. 딱히 거울을 볼 필요도 없다.

이처럼 생각을 하지 않고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썩 괜찮은 일이다. 그건 버스에 무임승차를 하는 기분이다. 전혀 의식을 하지 않고 적당히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에 올라탔는데 생각해보니 요금을 지불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식하지 못했던 행위기 때문에 죄의식도 없었고 당당히 운전기사 아저씨 옆을 지나친 것이다. 어쨌든 별문제 없이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고, 주머니엔 지불하지 않은 버스비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황.

출근 준비를 위해 정당히 지불해야 할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더 힘이 난다고나 할까? 이런 점 때문에 나의 출근 준비는 다른 이에 비하면 조금은 편안하고 여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더 잠을 자고 싶은 욕구라던가, 오늘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아침 메뉴의 선택이나 면도를 하다 얼굴을 베이고 마는 비극 따위가 없다. 삶을 힘겹게 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지나친 생각 때문에 발생하거나 더욱 커지기 마련이니까. 모든 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몸의 습관에 맡겨버리면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난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친 채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알아서 조립되는 컬리티 비처럼 말이다.

집을 나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한 낮이 되면 꽤나 더워지는 요즘 날씨지만 그래도 아침저녁으론 선선한 바람이 분다. 종종 골목에서 보이는 갈색의 삐쩍 마른 고양이가 날카로운 눈으로 날 한 번 바라보더니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 밑으로 빠르게 도망갔다.

갑자기 고양이를 보니 집에서 고양이를 두 마리 기르고 있는 출판사의 홍보담당자가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니까요. 고양이의 발톱을 깎는 일은 뭐랄까 일종의 거래랑 비슷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영화에서 보면 마지막 장면에 꼭 악당이 인질을 잡아두고서는 주인공과 거래를 하는 장면이요. 거래라는 게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걸 전부 말하면 안 돼요. 처음 만나자마자 상대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패를 다 보여줘 버리면 다음부턴 계속해서 상대방에게 끌려다니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약간은 무심한듯한 말투가 좀 필요해요. 가령 뭐 나에게 그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 정도쯤이야... 이런 식의 말투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하나씩 하나씩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나가는 거죠. 고양이 발톱을 자를 때도 처음부터 고양이용 발똡깍이를 들이밀면 절대 안 돼요. 간식이나 고양이 장난감으로 유인한다던가 아니면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엉덩이를 때려주면 고양이는 경계심을 없애고 옆에 편하게 머물게 돼요. 아, 엉덩이를 때려준다는 말에 이상한 생각을 하신 건 아니겠죠? 고양이는 왜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엉덩이를 때려주면 상당이 좋아해요. 뭔가 성감대가 그쪽에 있나 봐요. 아무튼 그렇게 친근하게 접근해서 고양이가 경계심을 없앨 무렵에 슬슬 발똡깍이를 꺼내는 거죠. 얼굴엔 미소를 머금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계속 재밌게 놀자, 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조심스레 발똡을 깎아야 해요. 앞발엔 다섯 개씩 있고, 뒷 발엔 네 개씩 있으니 총 열여덟 개의 발톱을 깎아야 하죠. 이거 나름 꽤 피곤한 일이라고요.

라며 요즘 자신이 아침에 종종 사무실에서 꾸벅꾸벅 조는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그녀의 피곤함은 고양이의 발톱을 깎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라는 이상한 결론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세상에 역시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 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다못해 고양이와 거래를 하면서 발톱을 자르는 것도 쉽지가 않은데 사람을 만나고 겪어내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관계를 이끌어 나간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둘 다 나에겐 어려운 문제다. 물론 난 고양이 발톱을 한 번도 깎아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집 앞 골목에 있는 택배 회사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많은 택배 상자들을 회사 직원들은 빠르게 분류했고 그것들을 작은 택배 트럭에 옮겨 싣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고 빠른 분류였다. 나는 산처럼 쌓여있는 택배 상자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 많은 물건들은 다 누가 사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많은 상자들 안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을 것이다. 고양이 통조림이라던가 나이키 운동복, 대용량 사이즈의 샴푸나 린스, 코털을 제거하는 작은 기계 따위들. 정말이지 요즘은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만 몇 번 움직이면 뭐든지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가락이 바빠질수록 택배 회사 직원들의 손은 더욱 분주해질 것이다.

택배회사를 지나치면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 나온다. 나는 종종 이곳에서 인스턴트 도시락이나 햄버거를 사 먹는다. 지금 시간이면 짧은 단발머리의 조금 통통한 여자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편의점을 지나치면서 바라보니 점원 여자아이는 작은 손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아침의 거리는 다소 한산하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요구르트를 배달하는 아주머니가 전동식 배달 카트를 몰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배달 카트의 윙 하는 소리가 내 뒤로 점점 사라지자 골목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 세 명이 튀어나왔다. 그중 한 명은 가끔 동네 골목에서 마주치던 아이 었다. 요새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살이 많이 빠져서 제법 교복을 입은 맵시가 났다. 여자아이를 스쳐 지나가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라고.


봄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해가 점점 길어졌다. 이제는 퇴근시간이 지나도 날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얼마 동안은 내가 너무 일찍 퇴근을 한 건가, 라는 생각도 했었다. 밝을 때 집에 들어가는 게 영 익숙지 않아서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는 구실로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집에 가곤 했었다. 한강을 따라 걷기도 했었고 서점에 들러 책을 보기도 했다. 마트에 들려서 장을 보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좋아했던 건 역시 집 앞 바에 들러서 맥주를 마시는 일이었다. 그곳엔 맥주도 있었고 소리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요 며칠 소리가 보이지 않았다. 날짜를 체크해보진 않았지만 지난 주말 이후로 보지 못한 것 같으니 벌써 닷새쯤 바에서 소리를 보지 못했다. 이건 내가 소리를 알고 지낸 이후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소리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시간의 대부분을 바에서 보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부러 소리를 만나기 위해 바에 가는 건 아니었었다. 내가 바에 가는 것도 소리처럼 일종의 습관이었고, 소리와 나의 비슷한 습관이 바에서 서로 얽힌 것이다. 의식하진 않았지만 매일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건 나에겐 약간의 불안함이었다.

오늘도 나는 퇴근 후 바에 들렀다. 맥주를 마시고 싶기도 했지만 마음속 한편엔 소리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바의 주인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소리가 바에 없다면 적당히 맥주를 마시다가 넌지시 바의 주인에 거 물어보면 된다. 요즘은 소리가 보이지 않네요,라고. 그러면 그는 유리컵에 시원한 맥주를 따르면서 뭔가를 말해 줄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리는 마치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고 있었던 사람처럼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뭔가 어려운 문제를 떠안고 있는 듯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소리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난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반가운 마음에 맥주를 한 잔 시키고는 소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리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 한 구석엔 깊은 안도감 같은 것이 내려앉았다.

“한참을 안 보이더니. 난 어디 이사라도 간 줄 알았어. 어딜 다녀오기라도 한 거야?”

“어디 좀 다녀왔어요.” 소리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게 다야?” 약간은 투덜거리듯이 내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난 나름 걱정이란 걸 했어. 매일 보이던 사람이 정말 갑자기 안 보이는 건 꽤나 견디기 힘든 일이야. 정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미안해요. 그게... 그러니까 갑작스레 어디를 가게 됐는데 출발할 때도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몰랐거든요. 얼마를 다녀올지도.” 소리는 맥주잔에 얼음을 넣으며 말했다. 얼음이 들어가자 하얀 거품이 생겼다. 그녀는 종종 맥주에 얼음을 넣어 마시곤 했다. 맥주잔에서 달그락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소리의 대답은 모호했지만 소리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 내 눈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난 충분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히 묻지는 았았다.

“아냐. 뭐 네가 미안해할 일을 아니지. 그래,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잘 다녀오긴 한 거야?” 내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응. 머리가 좀 복잡했는데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맥주 맛도 한결 좋아요. 심장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해요.” 소리는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함께 맥주를 마셨다.

“그에게 연락이 왔었어요. 자기를 어딘가에 좀 데려다 달라고. 2주가 넘게 연락이 없더니,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어딘가에 좀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어디라도 좋다고.” 한참 맥주를 마시다가 소리가 말했다. 조금 짐작하긴 했었지만 역시 한동안 소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남자 때문이었다.

“그래?”

“응. 그와 여행을 다녀온 거예요. 목적지도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녔어요. 그가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면 바다에 갔고, 산이 보고 싶다면 산에 갔어요.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하면 라면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싶다면 맥주를 마시고. 매일매일 함께 손을 잡고 지냈어요. 그리고 그가 이제 돌아가자고 해서 돌아온 거예요.”

그와의 여행을 회상하는 소리의 얼굴에는 작은 피곤함이 있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왔네. 난 네가 다시 안 오는 줄 알았어.”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아니, 어디에도 가지 못해요. 왜냐면 그가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사람이니까.” 소리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어디에도 가지 못해요, 라는 말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어쩌면 그건 그를 만나고 난 후부터 소리가 계속해서 놓아야만 했던 스스로에 대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너한테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 나는 소리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녀가 그건 아니라는 대답을 해주길 바랐다.

“중요하냐고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없이도 난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소리는 집게 손가라고으로 맥주잔의 끝부분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 사람은 까만 점이에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일단 한 번 눈에 들어오면 계속 신경 쓰이는 새하얀 도화지 위의 까만 점. 애초에 보이지 않았으면 새하얀 도화지였을 텐데 이미 까만 점이 눈에 들어와 버려서 그래서 더 이상은 새하얀 도화지 아닌 거. 그게 지금 나예요.”

“작은 까만 점 따위는 얼마든지 지워버릴 수 있어. 그리고 애초부터 새하얀 도화지는 세상에 없어. 모두 마음의 문제인 거지.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알아요. 모두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거. 그런데 중요한 건 그가 날 필요로 한다고요. 그가 나를.” 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소리의 목소리는 약간은 떨렸고, 약간은 슬펐다.

그에게 소리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필요를 저버릴 만큼 소리는 모질지 못하다. 그걸 사랑이라 부르 건 동정이라 부르 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런 류의 감정들은 껍데기만 다를 뿐 본질을 똑같으니까.

“그가 널 필요로 한다…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나도 가끔 네가 필요한 것 같아. 이곳에서 혼자 마시는 맥주는 영 맛이 없거든.” 나는 약간의 질투를 담아 말했다. 더 이상 소리의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알아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아저씨랑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요.”

“그거 참 고맙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가 고마웠다.

“맥주나 마시자고. 너랑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 혼이 났어.”

소리와 나는 잔을 부딪혔다.


그 날 우리는 밤이 새도록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셨다. 바의 주인이 우리에게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며 말릴 때 까지도 우린 맥주를 마셨다. 소리도 나도 이렇게 함께 맥주를 마시는 건 오랜만이었고 또 우리는 기분이 좋았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맥주는 이럴 때 마셔야 되는 것이다. 바가 문을 닫는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바를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가지고는 소리의 집으로 갔다. 내가 소리의 집을 가게 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리는 좁은 골목의 끝에 있는 2층 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꽤 오래된 집이었다. 1층에 방 두 개와 거실과 부엌, 화장실이 있었고 2층에 방 두 개가 있는 혼자 살기엔 꽤나 넓은 집이었다. 특징이라고 할 만한 건 딱히 없었지만 집 안 가득히 책이 꽂혀 있었다.

“이 책들 모두 다 읽은 거야?” 나는 꽤나 취해있었지만 그래도 꽤나 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 도저히 그 많은 양의 책들이 모조리 그녀의 책이라곤 믿기지 않았으니까. 소리는 자신은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대부분 아빠랑 오빠 책이에요. 내 책은 열 권도 채 안될걸요? 두 사람 모두 책만 읽는 샌님이거든. 재미없게 말이야. 난 책 읽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음악을 듣는 게 더 낫지. 아니면 맥주를 마시던가.” 그녀가 맥주병의 뚜껑을 따며 말했다. 뭐가 재밌는지 소리는 계속해서 킥킥대며 웃었다.

“아저씨 혼자 사는 여자 집에 처음 와봐요? 왜 그렇게 어색하게 서있어요? 편하게 있어요. 편하게.”소리는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여자 집도 처음이긴 하지만 아무래 생각해봐도 누군가의 집에 방문한 건 정말 오랜만이야. 이럴 땐 빨리 화장실의 위치를 확인해 둬야 하는데. 난 긴장하면 꼭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지거든.”

나도 웃으며 말했다.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소설, 건축 전공 서적, 타블로이드판 잡지, 백과사전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양이었다.

“아버지랑 오빠와는 함께 살지 않는 거야?”

집 안에는 책을 제외하곤 소리의 흔적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흔적이란 없었다.

“오빠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더니 이젠 아예 미국에 눌러살고 있어요. 한국에 오지 않은지 10년도 넘은 것 같아요. 거기서 결혼도 했고 애도 두 명이나 있고. 물론 난 아직 내 조카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여자애 한 명과 남자애 한 명인데 다행히 오빠를 닮지 않아서 꽤 예뻐요. 그리고 아빠는 혼자 나가 사신지 꽤 됐고. 덕분에 이 넓은 집에 혼자 살고 있죠. 아빠는 매달 생활비도 꼬박 보내주세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쯤 아빠를 만나서 함께 밥을 먹어요. 아빠의 새 애인과 함께. 그리고 아빠와 오빠와 같이 살고 있으면 내가 아저씨를 우리 집에 데려왔겠어요?”

소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했다.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은 아닌 것 같아보였지만 소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신경 쓰지 않으니 나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거실의 작은 테이블 위에 맥주를 올려놓고는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리고 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전철을 좋아해?” 그녀를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전철? 글쎄요… 그건 갑자기 왜?”

“난 전철이 다리를 지나가는 소리를 좋아하거든.”

“전철이 다리를 지나가는 소리요?”

“응. 전철이 다리를 지나갈 때 나는 소리가 있어. 우리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철가 지나다니는 다리가 있어. 한강을 건너는 다리 말이야.”

“어딘지 알 것 같아요. 2호선이 지나가는 그 다리 말하는 거죠?”

“맞아. 난 가끔 그 다리 아래에서 전철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소리를 듣곤 해. 탁 탁 탁 탁.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 그럼 기분이 좋아져.”

“전철이 다리를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요? 역시 아저씨는 독특해요. 전혀 평범하지가 않아.”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독특하다고? 하지만 독특하다와 평범하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그래도 난 쭉 평범한 인생을 살아오고 있는 걸.”

“아니요. 만약 아저씨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직 아저씨를 제대로 모르는 거야. 아저씨는 상당히 독특해요. 상당히.” 소리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내가 독특한가? 생각해보면 가람이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가람이도 소리도 나에게 독특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난 독특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문제는 내 시선보다는 타인의 시선이 옳을 때가 많으니까.

“그런데 왜 그 소리를 좋아해요? 그 소리 말고 나를 좋아해 줘요. 나도 소리잖아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술에 취해서 양 볼이 붉게 달아올랐고 몇 번이나 딸꾹질을 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바닥과 소파를 오가며 계속해서 자세를 바꿨다. 하지만 손에서는 맥주잔을 놓지 않았고 눈을 갸름하게 뜨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런 소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예뻐 보였다.

“전철이 다리를 지나는 소리는 규칙적이잖아. 그래서 성실하고. 기대했던 만큼 정확하게 탁 탁 탁. 변화 없이 말이야.”

“규칙적이고 성실하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다. 뭐 나쁘진 않네요. 생각해보면 세상에 규칙적이고 성실하고 게다가 변하지 않는 건 별로 없으니까.”

“맞아. 그래서 난 전철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소리가 좋아. 세상에 몇 안 되는 규칙적이고 성실하고 변하지 않는 거라서.”

“그런데 아저씨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요.”

소리는 몸을 내 쪽으로 숙여 얼굴을 나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며 물었다. 술에 취해 내 쉬는 소리의 숨이 바로 내 얼굴에 와 닿았다. 소리의 냄새가 술 냄새에 섞였지만 난 술보다는 소리의 냄새에 취한듯한 기분이 되었다.

“무슨 질문?”

나는 쑥스러워 얼굴을 살짝 뒤로 빼며 물었다.

“그 전철 소리 말고 나도 좋아해 달라고. 나도 소리니까. 나도 변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소리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내 옆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소리의 몸을 추슬러 소파 위에 눕혔다.


소리가 돌아왔다.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한 건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그 남자였고, 소리의 아버지와 오빠가 남긴 수많은 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리는 매일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보지도 않는 수많은 책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 맥주를 마시면서 말이다.

소리의 삶의 한 겹 한 겹을 알아갈수록 그녀가 가엾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붙들어줄 그 남자와 책들이 있다는 생각에 부럽기도 했다. 아, 거기다 맥주도 말이다.

그 남자, 책, 맥주.

이것들이 있으면 적어도 소리는 매일 바에 올 것이다. 그래서 바에 가면 난 소리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소리의 그 남자도, 집 안을 가득 채운 책들도, 시원한 맥주들도 너무나 고마웠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