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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08. 2020

떠나도 괜찮은데

김필 - 사랑하나

재아는 실험실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끄러운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고 온도는 7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수현은 씻지 않고 놔둔 비커들을 물에 담가 두었다. 호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내 든 담배. 수현은 필터를 만지작 거리더니 이내 물었다. 금연한 지 일 년 짼데 습관처럼 입에 문다. 재아는 연기가 나지 않는 담배 끝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 온도계 눈금이 78도를 가리키자 수현은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장갑을 꼈다.

 

잘 됐을까?

글쎄?

아직 시간 있으니까 안 나왔으면 다시 넣어보자.

 

수현은 배수 버튼을 누른 후 다시 급수 버튼을 눌렀다. 물이 채워지고 기계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꽤나 시끄러운 소리였다. 재아는 '하고 나와.'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재아는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수현은 휘휘 유리막대로 비커에 담긴 염색물을 저었다. 제대로 나온 건가 하면서 그것들을 들어 올린 은 힐끔 재아를 돌아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재아!!!
 
자신을 돌아보는 재아에게 수빼액, 한마디 더 한다.


 그러고 앉아있지 마라!! 넋 나간다.
 
20분 후 수은 건조기 앞에 서 있었다. 염색된 천을 꼼꼼히 잘 펴서 건조안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오늘은 일 없냐? 어째 나보다 더 한가한 것 같다?”

 

재아는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라는 눈으로 재아를 보던 수현은 가운에 젖은 손을 닦고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직하려고?

. 

“갈 거야?”

간다면?”

못 가잖아.

왜 못 가는데? 연봉이 얼만 줄 알아?

네가 연봉 따지는 애였으면 여기 다니고 있겠냐? 나 때문에, 넌 내 걱정돼서 다른 데 가서 일 못할걸? 일은 잘하고 있나, 하기야 남의 회사 돈 날리는 게 걱정이 아니라 나 회사 잘릴까 봐 넌 못 가지.

시간 됐다.
 
은 건조에서 꺼내 온 최종 염색물과 거래처에서 보내온 샘플을 비교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뭐라 말하기 그러네. 일단 보내봐야겠다.

“어쨌든 영 아닌 건 아닌가 보네. 이리 줘. 빨리 붙여서 보내버리게. 오늘 전화 왔었거든.”

 

수현은 샘플을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수현아.”

“어?”

“나 때문에 많이 불편했지?”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 연애하고 싶으면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 뭐라는 거야?

“아님 말고.”

 

재아가 벌떡 일어서자 회전의자가 뒤로 밀려나가 수현이 앉아 있던 의자에 부딪혔다. 의자가 서로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키보드에 올려져 있던 두 손의 움직임이 멈췄다.

재아를 돌아보던 수현은 붉어진 눈으로 자신을 보는 재아를 다시 외면했다.


“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놓았다. 핏줄이 도드라지는 손등을 물끄러미 보다 의자를 끌어다 털썩 앉고는 책상 위에 이마를 대었다. 새어 나오는 한숨에 수현이 깔아놓은 책상 보호대가 뿌옇게 흐려졌다. 아래에 깔아놓은 둘이 찍은 사진도 흐려졌다. 가만히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는 수현의 손길에 놀라면서도 재아는 피하지 않았다.


 영원한 건 없다고 말해왔던 수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내자고 했을 때 그러자 했던 이유는 그 언제나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었다. 자신은 그런 말에 아무렇지 않 튼튼한 심장을 만들어 놓을 거라고 만나는 순간순간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눈앞에서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헤어짐을 말하는 수현을 보며 재아는 그저 길어버린 앞머리만 쓸어내리고 있었다. 다시는 당신과 키스 못하겠지. 재아는 바보같이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이제 다신 수현을 안을 수도, 그 손을 달래듯 잡을 수도, 등을 토닥일 수도, 늦은 밤 술 한잔 하자 말할 수도 없을 거라고. 그게 서운했다. 친구로라도 지내자는 말을 뱉을 뻔한 순간에 수현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멀어진 거리만큼 잡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을 향해 뛰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건널목에 서면 아슬하게 신호가 바뀌어 버리던데 한참을 바뀌지 않는 신호를 보며 더 가슴이 두근댔었다. 재아가  한마디만 하자고 생각했을 때 수이 돌아보았다.


“잡으려고?”
 
흘러내리는 땀을 익숙하게 닦아내는 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물어? 왜 그냥 알았다고 해?
“수현아.”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언제나 저만치 있는 건  난 서러워 미치겠어. 왜 아무 말도 않는 거야? 헤어지자는데! 끝내자는데! 다 좋은 거야 아님 그냥 포기야? 너한테 나는 뭐야?
“수아!”
제발!
 
사람들이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신호가 울리면서 15초, 14초, 13초. 수 뛰기 시작했다. 그에게 선물했던 스니커즈가 속도를 내고는 이미 저기 길 건너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재아는 아득했던 시간들이 멀어지면서 다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수이 파트너가 됐을 때도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생각했었다. 결과적으로 어찌 됐든 함께하게 됐다는 생각에 ‘이제 어떻게 도 상관없다.’라고.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시간은 사람과 사람을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함 속에서 외로움을 찾아내 바득바득 아프고. 어쩌자고 그를 탓하는 말까지 해버리고 말았는지.
 
“나가자.
근무 중이야.
“직접 자고.
 
거래처 직원이 가져온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오늘따라 손안에 느껴지는 뜨거움, 미지근함, 차가움을 놓고 싶지 않아서 종이컵을 쥐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샘플을 들고 들어간 수은 30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뭐가 잘 되지 않은 건지 걱정이 됐다. 해는 저물었고 찬 바람이 열린 창틈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기상 이변은 봄에는 눈을 여름에는 우박을 퍼붓는다. 열려있던 창문을 닫고 거리에 켜지는 가로등을 보았다. 언젠가 저 길을 걸었던가.
과 함께 다녔던 많은 길. 언젠가 그곳에 섰을 때 ‘이 길 때문에 아파 죽을 것 같아.’라고 내뱉고 말 것 같아 피해 다녔던 길.
 
재아야.


뒤를 돌아봤을 때 수은 가지고 왔던 샘플 봉투를 그대로 손에 들고 있었다. 찮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던 수현이 창가에 올려두었던 종이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수현은 ‘아- 정말 이 쓴 커피도 오늘따라 달다.’라고 작게 말했다.
 
“아니래?”
“너 사막 가본 적 있?”
“아니.
낙타 보러 갈까?
뭐?
“사막에서 낙타 타고 모래바람을 맞다. 아니면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 언덕에서 낙타를 타다.
“퇴짜야?”
“모래바람이 지나간 듯한 바이올렛은 어떤 거야?”
 
현은 숨을 뱉더니 서류 봉투 끝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치고는 ‘골치 아파.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손을 뻗어 재아의 손을 잡아끌더니 ‘나가자.’했다.
 
“어딜?”
“오늘부터 벚꽃 축제야.
“안 갈래.
“왜?”
“사람들 싫어.
“겁쟁이.
 
이리저리 사람들 틈 속에서 꽃을 바라볼 새도 없이 앞으로 전진. 앞서 가는 수따라잡으려 했지만 오늘따라 구두를 신고 온 터라 역부족이었다. 아직 채 피지 않은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다 뒤에서 부딪혀 오는 사람들을 피해 벤치에 앉았다. 앞서가던 수이 이상했는지 돌아보았다. 앉아서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 재아를 발견하곤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목말라?”
“아니.
“너 기억나?”
?”
“여기.
 
여기. 첫 데이트. 역시나 사람들에 떠밀려 있던 시간. 하지만 닿은 두 손만은 좋았던 때. 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혼자 되뇌면서 함께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 번은 와보고 싶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재아는 그 후로 이곳을 찾지 못했다.

“수.
“응?”
“나 연애해도 괜찮아?”
“...”
“나 첫 데이트 때 여기로 와도 괜찮아?”
“...”
“괜찮아?”
 
아무 말 없는 수을 보다 가만히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떨어지지 않는 벚꽃잎. 언제나 그렇게 피어있을 것만 같아 더 눈물이 났었지. 발에 밟혀 짓이겨지는 꽃잎이라 그래서 떨어지는 동안이 그렇게 아름다운 건가. 수놓아진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셨다.
 
수현아. 너를 닮은 색이야.
“응?
“모래바람이 지나간 듯한 바이올렛.
“...”
안해. 미안하다고, 언젠가 말하고 싶었어. 나는 역시 겁쟁이였어.”

아의 볼에 수의 손등이 닿았다. 뜨거운 열기. 맞닿은 피부로 느껴지는 미안한 감정. 축제의 절정,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재아의 눈물은 조명에, 웅성거림에 녹아들었다.
 
그 밤이 지나고 수현이 감기 몸살로 이틀을 결근하고 출근한 날. 책상 위에는 재아가 남긴 봉투가 있었다. 너를 찾아냈어. 수현은 메모지 내려놓았다. 그리고 봉투 안에 있던 바이올렛 컬러의 천 조각을 꺼내 들었다. 신기할 정도로 알 수 없는  보는 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수현아,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 네가 사라져 버리면 어떨까 하고. 아주 아주 행복한 날, 더없이 좋은 날, 뜨듯한 방구석에 둘이 쭈그리고 앉아서 시시덕거리는 느낌. 그런 느낌들이, 그런 사랑이 사라져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고. 끝없이, 끝없이 혼자가 될까 두려웠어도 괜찮았어. 넌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될 테니까. 언제라도 불러보게 될 사람으로 남게 될 테니까. 


매일 괜찮다는 변명을 하고
네게서 도망친 나를 위로해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살아도
돌아가는 길엔 네가 떠올라

모진 말로 너를 밀어냈어도
여전히 매일 난 네가 걱정돼

좋은 사랑을 만나길 바라도
행여 그럴까 봐 사실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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