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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08. 2020

나는 지금이 좋아

전기뱀장어 - 보리

 지우는 가파른 언덕을 캐리어를 질질 끌며 거의 기다시피 오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는 정현 뒤통수를 바라보던 지우가 잠시 멈춰 섰다. 초여름, 언덕 끝에서 누군가 입김이라도 부는 것처럼 시원한 건지 더운 건지도 모를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어느새 많이 자랐구나 생각했다. 어깨쯤에서 찰랑거리는 지우 머리카락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끝이 갈라진 머리카락을 보며 '오늘 트리트먼트나 할까.'라고 중얼거리자 현이 돌아보았다. 어서 오지 않고 뭐해?라는 눈빛을 보내는 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고 있어.'

가파른 언덕을 두 번 오르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빌라들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세 번째 빌라 앞에 선 정현이 숨을 헉헉 대고 있는 지우에게 다가와 손에 있던 캐리어를 가져갔다.
 
"운동 부족이야, 송지우."

무릎을 짚고 서서 올라온 언덕을 돌아보던 지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정현의 뒤를 따라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2층 계단 위에 선 지우는 정현이 집 열쇠를 찾는 동안 계단 위를 보고 있었다. 촘촘히 이어지는 계단들. '저 위엔 누가 살까?'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딸깍 하고 문이 열렸다. 신발장 위에 열쇠를 걸어두고 안으로 들어서자 둘만 살기 적당한 공간이 나타났다. 방 두 개, 욕실 하나, 작은 화분들을 늘어놓아도 좋을 것 같은 작은 베란다. 베란다를 마주 보고 있는 주방. 꽤 쓸만한 집이 나왔다고 혼자 보러 갔다 오더니 덜컥 계약해버렸다고 말했었다. 지우는 어차피 함께 살기로 했던 거니까 잘했다고 대답은 했지만 앞으로 저 언덕을 구두를 신고 내려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다 아파왔다.

"어때?"
"계약도 마음대로, 동네도 마음대로. 뭐가 어떠냐는 거야?"
 
뾰로통한 얼굴로 집을 둘러보는 지우의 허리를 정현의 두 손이 감싸 안았다. 정현이 '좋잖아.'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열어놓은 베란다 문 사이로 또 한 번 바람이 들어왔다. '에어컨은 있는 거지?' 의 질문에 정현이 고개를 저었다. '선풍기 두 대. 그것도 공짜로 얻은 거야. 태영이 이사할 때 얼마나 애교를 떨었는 줄 알아? 비싼 선풍기라고 얼마나 생색을 내시던지. 지들은 에어컨 사서 이사하면서 말이야.' 지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펴곤 배에 올려진 정현의 두 손을 힘껏 떼어내고는 거실 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선풍기 2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야, 요즘 에어컨 없는 집이 어딨어!"
"이사하느라 돈 다 써버렸어. 하나씩 장만하면 되잖아. 신혼이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 자기?"


이럴 때 자기고 신혼이라지. 다음 달 월급 받으면 에어컨부터 사야겠다는 지우의 말에 정현이 피식 웃었다. 1년의 장거리 연애.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도 연애가 불편하다거나 하지 않았는데 며칠 동안 연락도 않고 잠적해버린 정현 때문에 지우는 두 달 전부터 서울로 오겠다고 했었다. 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해야 할 말은 미루지 말자 마음이었다. '나 서울역.'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후 지우정현처럼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태의 집에서 며칠을 지냈었다. 상의도 없이 올라온 지우 때문에 화가 난 정현은 와서 가라는 태의 전화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화난 건 나였는데."
"멋대로 올라온 건 너였어."
"가겠다고 말했는데?"
"나한테도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시간? 잠수 탄 건 너야."
"기다려달라고 했잖아."
"얼마나?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야? 나는 언제나 여기 있는 사람이야? 나는 항상 기다렸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데?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면 되잖아! 그럼 다 해결되는 거라고! 나는 그 말 한마디면 되는데 너는 왜 항상 네 입장만 고집하는 거야? 싸우자는 것도, 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도 아니라고!"
"너도 언제나 그래! 너도 네 입장만 얘기해."
"이기적이야."


그 말에 입을 다문 정현이 돌아서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뒤에 서 있던 태영의 동생인 율지우의 팔을 꽉 잡았다. '그런 말까지 할 게 뭐야.' 의 말에 지우의 시선이 떨어졌다. 몇 번의 문자 메시지, 몇 번의 안부 전화. 가끔 태, 과 함께 먹었던 저녁 식사. 말없이 밥을 씹어 넘기던 정현. '이기적이라는 말을 한두 번 듣는 게 아니니까.'라고 이 tv를 보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말에 율이 태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거실에 남은 두 사람은 한 동안 이 보던 영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엔딩 크레디트까지 보고 우가 리모컨으로 전원 버튼을 누르자 정현이 바닥에 앉아 있던 지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안았다.
 
"미안해."
"바보가....."
"미안해."
 
짐 정리를 하다 말고 베란다로 나가 정현을 물끄러미 보았다. 햇빛이 뜨겁다. 오늘 빨래를 해두는 게 좋겠지. 내일부턴 출근이니까. 세탁기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시원하게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걷어 올려진 바짓단을 내리고 젖어버린 발을 수건 위에 올렸다. 토닥토닥,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발가락 끝부터 전해졌다. '머리가 많이 자랐어.' 어느새 정현이 지의 발 앞에 와 있었다. '너도.'라고 대답하는 지우의 입술에 가만히 손가락을 올리고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어보곤 다시 볼. 정현은 지우의 발그레해진 볼에 살짝 키스를 남기일어섰다.
 
"이리 와."
 
가락을 까딱거리는 정현에게 의문의 눈빛을 보내자 '세탁기 돌아갈 동안 낮잠 자자.'라고 정현 말했다.
 
"그거 좋지."

지우는 가만히 자리한 정현의 품에 언제나 그 자리는 제 자리였다는 듯 파고들었다가 다시 두 팔로 마른 등을 감싸 안고는 어느새 팔을 풀고는 또다시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렸다. '자는 모습이 뻐서 계속 계속 재우고 싶어.'라는 정현의 낯간지러운 말에 지우가 눈을 찡그렸다.
 
"넌 어쩜 그런 말을....."
"뭐 어때? 넌 자고 있을 때 천사 같아."
"그래, 입 다물고 있으라는 거지?"
"글쎄, 나 잔다."
"알람! 세탁기 돌아갈 동안 만이야!"
 
어느 동네 노래인지 참 낯간지럽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울리는 지우의 핸드폰을 건드렸다. 언제 찍었는지 정현의 옆모습이 찍힌 사진이 바탕화면에 저장되어 있었다. 정현은 '초상권 침해다.'라고 중얼거리곤 기본 화면으로 변경  놓았다. 힘차게 기지개를 피고 피곤했던지 곤히 자는 지우를 보다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지우를 가만히 보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조심히 문을 다. 세탁기는 탈수 중이었다. 열심히 돌아가는 세탁기 위에 손을 올리자 세찬 진동이 전해졌다. '드드드드  목욕탕에 있는 진동기 같지 않아?' 지우의 말에 웃었더랬다. 5분 후 탈수가 되면 빨래를 널고 지우를 깨워서 시장이나 보러 갈까 생각하며 베란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빌라 옆에 작은 놀이터가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네 타는 것도 애들처럼 좋아하던 지우가 생각나 이따 밤에 산책이나 나올까 생각하며 싱글 거렸다.
 
오늘 밤 지우가 앉아 있을 그네에 앉아 가만히 발을 굴러보던 정현은 언덕을 낑낑 거리며 오르는 여자를 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등을 덮은 여자는 시장이라도 보고 온 건지 두 손에 짐을 가득 들고 있었다. 갑자기 여자가 우뚝 멈춰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고개를 돌려 이 쪽을 보던 여자와 눈이 마주친 정현은 구르던 발을 멈추었다. 흥얼거리던 노래도 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지우의 것과 닮아 있었다. 그 눈빛, 어디서 본 듯했다.
 
"... 정현 선배?"
 
짐을 떨어뜨리고 놀이터 쪽 계단으로 뛰어오는 여자가 자신이 아는 여자가 맞는 것일까 정현은 달려오는 여자를 다시 보았다. 헉헉대는 숨을 고르고 무릎에 자신의 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드는 사람. 흘러내리는 땀이 이마를 타고 턱에 맺혔다. 여자는 손등으로 땀을 닦아내더니 이내 몸을 세웠다.

"나예요."
"... 알아."
 
가 앉아야  그네엔 영은이 앉아 있었다. 검은색 컨버스화에 모래가 묻었다. 스-윽 스-윽 모래를
영은의 발이 잠시 멈췄다.

"여기, 웬일이에요?"
 
너를 만나 온 건 아니야. 정현은 속으로 대답을 했고 그저 웃고 마는 정현을 보며 영은 일어섰다. 어느새 키가 더 큰 건가 하고 올려다보자 영은이 웃었다. 그때도 그런 미소로 서 있었다. 손을 내밀었을 때도 손을 놓았을 때도. 그때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생각해보니 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냥. 바람 쐬는 중이야."
"선배."
"응?"
"오만인데, 반갑다든지 잘 지냈어? 라던지 그런 질문은 안 해요?"
"전하네. 할 말 알려주는 거."
"선배도 여전하네요. 듣고 싶은 말은 절대 안 해주는 거."
 
고개를 숙이자 흑색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후- 하고 내쉬는 한숨에 정현도 고개를 숙였다. 발끝에 묻은 모래, 지우에게 혼나겠다는 생각뿐. 탈수는 다 됐겠지. 이 근처에 밥집이 있던가. 그런데 지우, 일어나서 나 없는 거 알면 걱정할 텐데.

"영은아."
"네?"
 

정현이 일어나서 그네를 붙들었다. 흔들리는 그네가 멈추자 정현이 한 걸음 떼 영은에게 다가갔다. 두 손으로 영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웃어 주었다.
 
"반갑다. 지냈어?"
"..."
" 잘 지내. 지금, 참 좋아.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은을 놓아주고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언덕길에 영은이  내려놓은 장바구니가 두 개. 길 한쪽에 짐들을 놓아두고는 집으로 향했다.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지우처럼 오렌지빛 볼이 되어가는 은을 돌아보았다. 난, 그때처럼 사랑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뭐야~ 어디 갔다 온 거야!"
 
현은 첫사랑이라고 말은 못 한 채 웃어 보이곤 안으로 들어섰다. 지우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들고 있던 빨래를 집어던졌다. 툭- 속옷이 정현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지우가 뛰어와 잽싸게 채갔다. 지우는 큭큭거리며 웃는 정현 엉덩이를 뻥 차주고는 세탁물 통을 낑낑거리며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송지우."
"응?"
"잘 잤어?"
 
엉켜버린 빨래를 풀던 지우의 손이 멈췄다. 갸우뚱한 고갯짓에 웃음이 났다. '너 잘 잔 거 다 아는데?' 하자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안 도와줘?"
"가요, 가."
 

함께 빨래 널기란 힘든 것. 정현이 속옷을 뒤에 널자 지우는 '빨리 마르는 건 앞에, 수건 같은 것도 바로 안 갤 거면 앞쪽에.'라고 말했다. 다 귀찮다는 듯 지우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현을 보며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내 폰 바탕화면 왜 바꿔놨어?"
"그러는 넌 내 사진 언제 찍은 거야?"
"비밀."
"그럼 나도 비밀."
 
'진짜 이러기야?' 장난스레 지우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던 정현아오는 지우의 손찌검에 등짝을 손바닥으로 가려야 했지만 뭐가 재밌는지 웃고 있었다. 정현은 굽이 높은 구두를 포기하지 못하고 언덕을 내려갈 지우가 걱정됐던지 스니커즈 운동화를 현관에 잔뜩 깔아놓았다.

"송지우, 나 엄청 착해졌지?"


함께일 때 또 멀어질 때
니가 옆에 있어 괜찮을 수 있어
어색했던 나의 하루도
어딘가로 날 데려갈 때
내 두 눈을 니가 모두 가려도 좋아
어차피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너의 옆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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