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꿈 하나쯤 품고 산다. 물론 그 꿈의 내용과 방향은 각자 다 다르다. 누군가는 창업해서 큰 성공을 이루고 싶고, 또다른 누군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주고 싶다. 멋진 소설 한 편 완성하고 싶은 사람도 있으며, 사회에 무언가 선한 영향을 주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저 각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거니까. 그 꿈에 우리는 꽤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산다. 언젠가는 그 꿈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문제는 그 노력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스물이 되어도, 서른이 되어도, 아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꿈을 이루는 일은 너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진다. 정말 한없이 어려운 것 투성이다. 희망회로부터 돌리며 시작한 창업은 회로가 까맣게 타버렸는지 늘상 해결해야 할 일 투성이고, “큰 기대 안 해”라고 말하지만 결과 발표일만 되면 내 마음 졸이게 만드는 공모전도 늘 탈락 소식뿐이다. 안정과 행복만 향해 갈 줄 알았던 연애와 결혼 생활은 늘 폭풍처럼 요동치고, 선의와 호의는 늘 둘리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아니,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
불안과 고통, 혼란을 거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굳이 이런 어려움을 견뎌가며 꿈 꿀 필요가 있겠냐고 말이다. 편한 삶, 안정이 보장된 생활로 돌아가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천재, 교수가 되다
꿈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사람의 삶부터 살펴보자.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이름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독일 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인문학적, 예술적으로 꽤나 영특한 모습을 보였다. 7살이 되던 해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했고, 8살 때는 간단한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목사 아버지를 둔 아들답게 성경의 구절을 암기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예뻤는지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꼬마 목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을 정도다.
물론 뛰어난 부분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는 법이다. 니체는 14살이 되던 해에 추어 포르테라는 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많은 철학자들과 달리 그는 ‘수학’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소수의 친구들 외에는 그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도 그의 결함이라면 결함이었다.
1864년부터 니체는 본 대학에 입학해 신학과 고전문헌학, 예술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학적을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고전문헌학에 깊이 천착하는 한편,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세상이 합리적이지 않으며 맹목적인 의지가 삶을 지배한디는 쇼펜하우어의 입장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1869년 20대 중반의 나이로 바젤 대학 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니체는 교수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매번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고, 타 대학에서는 그를 스카우트할 방법을 찾고 싶어 안달이었다.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한 ‘장밋빛 미래’가 펼쳐져 있었던 거다.
인간은 안정이 아닌 ‘힘’을 원한다
니체의 생애를 마저 살펴보기 전,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살펴보자. 우리 삶은 도대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안정된 삶, 굴곡 없는 적당한 인생을 살면 안 되는걸까? 여기에 대한 니체의 대답은 ‘(그건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력이 고양되는 감정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비록 그 삶이 짧고 험난하더라도 말이다. 안락과 연명만 바라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인간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자신의 힘을 키우고, 이를 통해 위대한 무언가를 성취하며 자신의 고양됨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 누구나 가진 충동이자 본질적인 욕망이라는 이야기다. 장수와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를 조소하고 결멸하는 존재로 만드는 행위이며, 자신의 몰락을 바라는 것과 같은 일종의 ‘종말’에 불과하다.
안락한 생존과 쾌락 가득한 삶만 추구하는 유형의 인간을 니체는 ‘말세인’이라고 불렀다. 말세인들은 자기자신의 안락함만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그마한 불편만 겪어도 짜증을 내며, 세상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반대편에는 ‘초인’이 있다. 초인은 자신의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존재다.고귀한 인간 혹은 기품 있는 인간이라고 불리며,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하며 외부의 상황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인간, 나아가 항상 그 상황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다. 물론 이들에게 세계는 단연코 아름답고 풍요롭게 보이고 말이다.
다시 반복되어도 좋은 삶
그렇다면 초인처럼 사는 삶, 다시 말해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니체가 말한 인간의 정신발달 3단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사자의 정신에서 아이의 정신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며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말하며,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줄 알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하는 정신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아이의 정신’은 니체의 철학이 지향하는 최종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정신은 마치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재미있는 일을 할 때 ‘왜 이걸 해야 하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하는 거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제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삶을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아이의 정신으로 살기 위해선 지금의 인생이 다시 반복될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와 관련해 그는 꽤나 재미있는 사상적 실험을 했다. 바로 영원회귀라는 실험이다. 영원회귀는 ‘삶의 매순간이 바뀌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는 혹시라도 다음 세상이 있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슬픈 일 또는 기쁜 일이 똑같이 되돌아 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일이 크든 작든 관계없이 말이다.
만약 이처럼 같은 생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겹다’거나 ‘그런 일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초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물론 초인의 삶을 사는 사람 또한 매순간 어려움을 마주치며 살아가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한 번 이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대답을 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매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삶’이자 ‘아이의 정신’으로 사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어라!
초인의 삶, 아이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어서 살아간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늘 획일적인 인간으로 자라고 성장하길 강요 받으면서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온종일 학교와 집에서 ‘공부 잘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사회에 진출한 뒤부터는 ‘더 높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살아왔다. 이런 ‘길들이기’는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즐거움과는 멀어진 채 청소년기를 보냈고, 성인이 된 뒤에도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수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온 거다.
니체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적성과 성격, 환경을 세심하게 고려하는 것은 물론,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거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가는 주체성을 지니는 것이다. 남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고 끝끝내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삶의 즐거움을 알아낼 수 있는 길이라는 얘기다. 니체는 말한다.
인간에게 지상과 삶은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져서 새가 되려고 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초인의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 중 일부는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서 살아가는 자신을 ‘진정한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 되기 위해서는 이런 거짓된 나부터 극복해야 한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타고난 적성과 성격, 환경을 넘어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은 물론, 단점조차 장점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사람이다.
천재, 무너지다
누군가는 니체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아마 니체 또한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말이다. 만약 그런 생각을 했다면 니체의 삶에 관한 못다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도록 하자.
승승장구하던 니체의 삶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선택 때문이었다. 발단은 1872년 자신의 대표작인 <비극의 탄생>을 출간하면서부터였다. 책이 세상에 나온 직후부터 니체의 기대와는 다른 반응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는 기존의 서양 주류 철학이 강조해 온 이성과 절제, 중용 같은 가치들을 거부하고, 생성과 소멸, 파괴, 창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 문헌학자들은 니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얼마 뒤 그는 고전문헌학계에서 사실상 추방된다.
건강도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1870년 보불전쟁에 위생병으로 참전했다가 걸려버린 이질과 디프테리아가 그 시작이었다. 끊임없는 두통과 경련을 경험했고, 시력도 크게 떨어져 버렸다. 결국 그는 35살의 나이로 교수직을 그만두게 된다. 그럼에도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1881년에는 영원회귀의 구상이 담긴 <아침놀>이 출간되었으며, 1882년에는 <즐거운 학문>, 1885년에는 <힘에의 의지>와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완성되었다. 이어 1886년과 1887년에는 또 다른 대표작인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하지만 1889년이 되어 니체의 건강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광장에서 매를 맞는 말을 갑자기 끌어안고 울다가 졸도해 버린 것이다. 이후 오랫동안 그는 병상 신세를 지게 된다. 몇 년 뒤에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5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누구보다 주목 받는 학자였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해 평생을 외면 받으며 살아간 인물이 바로 니체였던 것이다.
포기하지 말 것, 끝까지 별을 품을 것
삶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평생을 살아가고, 또다른 누군가는 흙수저로 태어나 하루하루를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니체는 이런 세상 속에서 운명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단죄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자유의지의 철학’과 일종의 패배주의에 해당하는 ‘숙명론’, 마지막으로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운명애(愛)의 철학’이 그것이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쉽게 말해 ‘하면 된다’고 외치는 철학이다. 이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실패를 보며 “당신이 실패한 이유는 그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성공한 이유는 노력과 의지, 용기 때문이며, 누군가의 실패는 자신만큼 최선을 다 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숙명론은 일종의 패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숙명론에 매몰된 이들은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돌린다. 자신의 실패는 ‘운이 없기 때문’이고, 누군가의 성공 또한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거다. 실패한 이들을 손가락질하고 매몰차게 대하는 자유의지의 철학과 달리, 숙명론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 운명애의 철학은 자신에게 던져진 역경과 고난을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철학이다. 이는 흡사 자유의지의 철학과 비슷해 보이지만, 인간에게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도 있음을 인정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가령 음악에 소질이 전혀 없는데 노래를 평생 업으로 삼겠다고 하거나, 공부에 재능 없는 아이에게 “노력하면 다 된다”며 닦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자신이 타고난 재능과 여건을 잘 이해하고, 이를 바탕삼아 더 큰 성취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운명애의 철학을 지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물론 운명애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이 가진 소질과 재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한계를 뛰어넘어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계를 알고, 자신의 가능성을 이해했더라도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은 늘 어렵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굳이 거창하게 ‘꿈’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결코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다가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분명 아픈 속 달래가며 한 발 물러서야 할 순간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 거다. 아니, 기쁘고 즐거운 시간보다 그런 시간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과 노력, 그 둘 모두를 품은 시간이 쌓여 다시 한발 두발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당신이 여느 때처럼 그 고통 순간을 건너는 중이라면, 그리고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다시 한 번 사로잡혀 있다면, 니체의 말을 기억하자.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마음속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문장 말이다. 당신은 지금 별을 품고 사는 중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만큼 반짝이는 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