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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Mar 28. 2020

<낙태에 대한 옹호> 읽기

철학유치원 논문 읽기

주디스 자비스 톰슨의 <낙태에 대한 옹호>는 임신중절을 둘러싼 윤리적, 철학적, 여성주의적 논쟁의 초창기에 발표된 논문입니다. 1971년에 발표된 이 논문을 통해, 저자는 낙태가 부당한 죽임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반대하고 태아를 죽이는 모든 경우가 부당하지는 않음을 보이고자 하는데요. 오늘 인문학 유치원에서는 해당 논문의 논지를 따라가며 낙태 옹호론의 초기 주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톰슨은 낙태 반대론의 가장 주된 전제를 반박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로 ‘수정되는 순간부터 태아는 인간이다. 즉, 수정에서 시작하여 출생을 거쳐 아이가 되는 인간의 발달이 연속적임을 인지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그것이죠. 그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 지점 이전에 이 사물은 사람이 아니지만 이 지점 이후에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물의 본성 속에서 어떠한 좋은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선택을 내리는 것이며, 이에 따라 태아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 내린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 톰슨은 이것이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도미노의 오류’라고도 불리는 이 문제는 마치 미끄럼틀을 한 번 타기 시작하면 끝까지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처럼 과도한 비약이 이뤄지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죠. 톰슨은 이를 식물의 성장 과정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즉, 이들의 주장은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는 발달 과정에 대해 ‘도토리가 참나무다’라는 모순적인 결론을 도출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죠.


다음과 같은 주장도 많은 낙태 반대론자의 지지를 받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생명권이 있다. 그러니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있다. 자신의 몸속에서 또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결정할 권리는 어머니에게 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한 사람의 권리는 자신의 몸속에서 또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결정할 어머니의 권리보다 강하고 엄중하며, 따라서 그보다 중대하다. 그러므로 태아를 죽여서는 안 되겠다. 다시 말해 낙태는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죠.


톰슨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이런 논리를 반박합니다. 어느 날,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신장 질환을 앓고 있는 저명한 첼로 연주자와 순환계가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죠. 나의 신장은 내 자신의 혈액은 물론이고, 그의 혈액에서도 독소를 뽑아내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관을 연결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관을 뽑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과 같다. 유감스럽지만 딱 9개월만, 혹은 9년, 아니 평생동안 이 관을 연결해 두겠다.” 톰슨은 만약 이것이 잔인무도하다고 느낀다면 낙태 반대론자들의 입장 역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반박에 대해 낙태 반대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는 납치된 상황이며, 첼로 연주자의 치료를 돕는 수술에 자원한 적이 없음을 전제한 것이므로, 강간을 통한 임신만을 예외로 삼자.


톰슨은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강간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닌 한에서만 사람에게 생명권이 있는 것인가? 모든 사람에게는 생명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 특히 강간 때문에 존재하게 된 사람은 - 다른 사람보다 생명권을 덜 가지는 것인가?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아마 지금 이 영상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는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낙태조차 허용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롭지 않은 경우라면 ‘모든 사람에게는 생명권이 있으니,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생명권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은 많을 것 같은데요. 톰슨은 여기에 대해 ‘생명권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선 생명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의견’이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사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정말 최소한의 것이 감히 요구할 권리조차 없는 무엇이라고도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을만큼 아픈데, 탕웨이가 내 이마를 짚어주어야만 내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탕웨이에게 이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죠. 이런 논리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첼로 연주자가 생명 유지를 위해 나의 신장에 대한 사용 연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나의 신장에 대한 사용 연장을 받을 권리가 그에게 있음을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즉, 탕웨이의 행동 혹은 나의 행동이 호의로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이는 권리의 입장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생명권에는 무언가를 받을 권리가 포함되지 않으며, 누군가에 의해 죽지 않을 권리만 해당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의견에 따라 모든 사람이 첼로 연주자를 죽이지 않아야 한다면, 모든 사람은 다른 많은 종류의 일, 즉 목을 베거나, 총으로 쏘거나, 그를 연결하는 관을 뽑는 일 등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장을 계속 사용하기를 첼로 연주자에게 요구할 권리가 그에게 있다는 주장은 의무 아닌 호의에 해당할 뿐이며, 누군가의 개입을 통해 나의 신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막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 또한 인정 받을 여지가 충분합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나는 생명권을 가진다는 것이 타인의 몸에 대한 사용권 내지 사용 연장권을 가짐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러한 권리를 필요로 할지라도 말이다.”


자, 그럼 생명권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보죠. 만약 형과 동생이 초콜릿 한 상자를 받았는데, 형이 이를 독차지하면 이는 형이 동생을 부당하게 대하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관을 뽑지 않으면 침대에서 첼로 연주자와 9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 뒤, 관을 뽑는 것은 연주자를 부당하게 대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에게 그와 같은 권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관을 뽑는 행위가 첼로 연주자를 죽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그리고 첼로 연주자가 생명권을 가지며,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짐에도 관을 뽑는 행위 가운데 내가 그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생명권에 수정을 가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생명권은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 자체가 아니라 부당하게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에 있다’는 것으로 말이죠.

이 수정이 받아들여진다면, 태아가 사람이며 모든 사람에게 생명권이 있다는 주장만으로 낙태를 반대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즉, 낙태가 부당한 죽임이라는 것도 증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생명권에 대한 수정이 받아들여지더라도 누군가는 이러한 주장을 펼칠 수도 있을 겁니다. 여성이 임신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음을 아는 상태에서 성교를 자발적으로 즐기고, 그런 다음 임신했다면, 태아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 또한 그 ‘부분적인 책임’에 그녀의 몸을 사용할 권리가 포함된다고도 볼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죠.

이에 대해 톰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선, 그는 이러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초대한 적이 없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만약 태아가 권리를 가진다고 해도 의사를 물을 수 없으며, 태아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태아가 어머니에게 의존적이라는 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죠. 또한 이러한 주장은 자발적 행위에 따른 임신을 간주한 것으로, 이 경우 강간을 원인으로 하여 존재하게 된, 그러나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는 자기 어머니의 몸을 사용할 권리가 없으며 낙태가 부당한 죽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죠.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여성이 그의 어머니라는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특별한 종류의 책임을 태아에 대해 지게 된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이런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첼로, 탕웨이와 관련된 예는 잘못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톰슨은 이런 의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우선 그는 만약 부모가 임신을 방지하고자 노력하지 않고, 낙태를 하지 않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를 다른 곳에 입양시키지도 않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면, 부모는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맡고, 그 아이에게 권리를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부모는 그 아이를 계속 부양하는 일이 어렵다는 이유로 아이의 생명을 대가로 삼으면서까지 아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가 보기에 만약 부모가 아이를 갖지 않도록 모든 합리적인 예방책을 다 썼다면, 존재하게 된 아이에 대한 생물학적 관계 하나만으로 특별한 책임을 맡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맡기를 바랄 수도, 바라지 않을 수도 있죠.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맡는 일이 커다란 희생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를 거절해도 됩니다. 즉, 부모는 낙태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주장에 대해 낙태 옹호론자들 또한 불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된 불만족은 낙태가 허용 불가능하지 않다고 분명히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태가 항상 허용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톰슨은 전면 동의나 전면 거부를 내놓지 않는 것이 자신의 주장의 장점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예를 들어 저자는 강간으로 임신하게 된 14살 여학생은 낙태를 택할 것이며 이를 막는 법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임신 7개월에 그저 해외여행을 미루는 것이 귀찮아서 낙태를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의사가 수술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명하는 것이죠.


더불어 톰슨은 몇몇 경우에서는 낙태의 허용 가능성을 찬성하지만,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죽음을 보장 받을 권리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첼로 연주자의 관을 뽑았는데 만약 기적적으로 연주자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의 목을 그을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는 아이를 떼는 것과 동시에, 아이가 죽었으면 하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옳다고 보지 않으며, 아이의 생명을 보존하면서 어머니에게서 떼는 일을 가능하게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공 임신 중절, 즉 낙태는 여성의 인권 신장과 더불어 끊임 없이 논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보다 여성의 몸을 우선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낙태 또한 하나의 살인이라고 말하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낙태는 옹호되어야 할 것인가요, 아니면 거부되어야 할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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