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던지는 질문
오늘 하루를 떠올려 보죠. 만약 지금 학생이라면 아마도 당신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을 겁니다. 직장인이라면 회사에 출근해서 주어진 업무를 보고, 회의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했겠죠.
그런데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 왜 공부를 했나요?
시험 잘 보려고요? 왜 시험을 잘 봐야 하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요? 무슨 일이 하고 싶나요? 기자? PD? 선생님? 의사? 경찰? 공무원? 당신은 왜 그것이 되고 싶나요?
직장인인 당신은 왜 출근했나요?
어제 저녁, 친구 혹은 가족에게 회사에 대한 불만 가득한 말들을 늘어 놓았으면서 말이죠. 돈을 벌어야 해서라고요? 왜 돈을 벌어야 하죠?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요? 무엇을 위해 먹고 사는 건가요? 입사 초 혹은 학교를 다닐 때부터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나요?
생각해 보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끌려다니는 삶을 삽니다.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고민하지 않은 채 말이죠. 주변에서 이쯤 됐으면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니 공부를 시작하고, 대학을 가야 한다고 말하니 대학에 가고, 지금 취업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말에 직업을 갖고, 이 나이가 넘기 전에 결혼하란 말에 결혼을 하죠. 아이를 낳고, 차를 사고, 집을 늘리는 것 또한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과 잣대에 맞춰져 있고요.
이처럼 우리는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과 시기에 따라 이끌려 다니는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객체의 삶이라고 부르죠.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유도 찾지 않고,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아니지만 꼬박꼬박 통장에 찍히는 월급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걸 바로 객체로 끌려다니는 삶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럼 한 번 물어보죠. 당신은 당신 삶의 진짜 주인인가요? 만약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렵다면 이를 확인해볼 수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삶이 일주일 남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죠.
만약 당신이 오늘 불치병 선언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죠. 이 병은 너무나 치명적이라 일주일 뒤에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겁니다.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죠. 그런데 이렇게 죽음이 눈 앞에 있다면 우리의 선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얼른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러 갈래요!”, “그동안 못 간 여행을 다닐 거예요!” 당신은 어떤가요? 죽음이 코 앞인데 지금 이 영상을 끝까지 보실 건가요? 내일 학교나 학원, 직장에 가실 건가요? 당신의 지금 삶을 그대로 이어갈 건가요?
20세기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죽음을 고마운 장치로 여겼습니다. 그는 우리의 삶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객체의 삶을 산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는 죽음이라는 장치를 앞당겨 본 사람이라면, 즉 자신의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앞당겨 생각해 봄, 즉 죽음의 직시를 통해 우리는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한 번 물어보죠. 만약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일주일이라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 건가요? 지금 나의 삶을 그대로 살아갈 건가요. 아니면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