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동반자, 혼자도 결혼도 아닌 다른 모양의 삶

by 수수

<외롭지 않을 권리: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라는 이름을 가진 책이 있다. 저자인 황두영은 지난 몇 년 간 논의되고 준비되었던 ‘생활동반자법’을 준비했던 사람으로 책 안에는 그 법이 입법된 이후 여러 관련법의 개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포함하여 말하고 있다. 생활동반자법은 내가 정말 관심 있고, 입법되기를 원하는 법들 중 하나이다. (현재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더욱 절실히 생활동반자법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 법 하나만이 아닌 연동되는 다양한 법과 제도, 사회의 변화 그러니까 다른 사회로의 이동을 상상했다.

‘생활동반자’란 무엇일까. 생활동반자 관계란, 흔히 가족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혈연이나 결혼으로 이루어진 민법상의 가족이 아닌 다른 약속의 관계를 말한다. 생활동반자법은 생활동반자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법체계를 만들고, 지원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법은 우리에게 왜 필요할까? 이미 많은 사람들은 결혼이 아닌 혼자서 살아가는 삶 혹은 혼자도 결혼도 아닌 다양한 삶의 모양을 고민하고 있고, 실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른 삶의 모양을 실현하고 있다. 결혼만이 삶의 정답이 아닌데도 결혼 외의 방식을 택한 사람들은 여러 법적 권리와 제도적 지원에서 배제되고 있다.

내가 생활동반자, 그리고 생활동반자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혼자서도 잘 살아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지금처럼 산다면 나는 아마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계속 가난하게 살 것이고, 적은 임금으로 아등바등 살 것이다. 또한 나는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나이 들어가는 비혼 여성들을 위한 지원책이 없다. 이런 것들은 나에게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인가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 이대로도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새로운 질문을 안게 했고 나는 그 답들 중에 하나가 생활동반자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나의 성적 지향과 관련하여 성적소수자 문제로 생활동반자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이성애자로 살아오다가 나를 양성애자로 정체화하면서 내가 나와 다른 성별의 사람과 사랑하고 파트너가 되는 것은 정상 범주로 이해되지만, 내가 나와 같은 성별의 사람과 사랑하고 파트너가 되는 것은 혐오차별의 대상이 되고 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상한 사실을 알고부터 나는 생활동반자법과 동성혼 법제화에 대해 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황두영의 책에서 쓰인 것처럼 ‘사실 성 정체성 문제는 생활동반자법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생활동반자법은 성 정체성, 성별, 성관계 여부 등은 전혀 묻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142).’ 그러니까 생활동반자는 누가 어떤 성적 지향을 가졌는지, 성별인지, 그들이 성애적인 관계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 서로가 생활동반자로서의 관계를 합의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다. 호흡곤란이 와서 쓰러졌고 급하게 응급실로 후송됐었는데, 그때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은 친구였다. 호흡이 안 되는 내 곁에서 놀란 마음으로 나를 다독거린 사람도, 119에 신고한 사람도, 병원에 함께 온 사람도, 병원에서 동생과 바턴 터치하며 간병을 해준 사람도, 매일 병원에 찾아와 잠깐이라도 얼굴을 본 사람도, 의료진에게 나의 상태를 알아본 사람도, 예정된 나의 일정을 미뤄주고 사정을 설명해준 사람도 모두 친구들이었다. 짧은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자주 생활동반자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더욱 더 생활동반자법에 대해 생각했다. 병원에 실려 간 날, 함께 있었던 여름의 글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숨을 잘 쉬지 못하고 있는데도 원가족이 아닌 친구란 이유만으로 원가족 보호자와의 연락을 원했다는 것이었다. 여름은 나의 생년월일도 알고 있고, 우리 집 주소도 비밀번호도 알고 있고, 나와 자주 만남을 가졌고, 내가 무슨 약을 먹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아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정작 내가 아플 때는 원가족이 아닌 이유로 보호자가 될 수 없고,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 책임을 요하는 자리로부터 나의 친구들은 나와 아무리 가까워도 쉽게 배제된다. 부모보다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은 것들을 나누는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일정 부분 생활동반자인데 법적 테두리에 들어서려 하면 가차 없이 튕겨져 나오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친구들은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있는 일정 부분 분명한 생활동반자이다. 언젠가 엠케가 눈 수술을 하고 일주일 정도 휴식이 필요할 때, 그녀의 집이 아닌 느집에서 생활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겨주었고, 웒은 나와 동생 그리고 엠케를 위해 매일 같이 밥을 차려주었다. 내가 아플 때 친구들은 나에게 밥을 차려주었고, 밥을 사주며 나의 건강을 살펴주었고, 나의 아픈 몸을 주물러주었다. 그것이 가족과 다를 게 무엇인가. 우리의 모습이 생활동반자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예전에 각자의 원가족과 그랬듯 같이 살거나 매일 보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이자 가족이고, 가족이면서 친구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여름휴가를 같이 가거나 여행을 같이 간다. 어제 만났지만 질리지도 않고 오늘 또 만나고, 내일 만날 약속을 잡는다. 우리는 같이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며 놀지만, 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를 한다. 우리는 사소한 이야기부터 자신의 고민과 앞으로의 계획들을 서로에게 가감 없이 나눈다.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기꺼이 진입하여 서로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함께 우리의 세계관을 넓혀가고 있다. 이것이 서로에게 중요한 관계가 아니면 무엇일까. 왜 친구는 가족보다 우선되지 못하고 쉬운 취급을 받을까.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란 낡은 관계성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상상, 가족이 아니어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인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변화해야 한다.


우리의 ‘결혼’ 아닌 같이 사는 삶과 ‘우리의 집’은 그런 상상과 인정이 현실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나는 몇 년 후에 친구들과 함께 사는 삶을 꿈꾼다. 세화와 챤과 함께 한 집에 사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옷이 많은 챤에게 넓은 방을 주고 챤의 옷을 같이 입어야지. 거실에는 우리의 책을 합친 책장을 두어야지. 당장 가까운 미래에 올 리 없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고, 진짜로 실현될지도 아직 모를 우리의 상상이지만, 혼자도 결혼도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사는 삶을 꿈꾼다. “나는 친구들이 나의 세계라는 것을 당당하게 인정한다. 나의 기쁨과 재미, 삶의 의지는 대부분 그 친구들 덕분이다.”라고 말한 브리앨런 호퍼(<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인용)의 글처럼 나의 세계에는 친구들이 있고, 그들의 세계에도 우리가 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다른 모양의 삶을 가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삶을 언제까지고 외면할 순 없다. 우리 모두의 더 나은 지금 여기의 삶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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