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_지구 끝의 온실
작가의 말이 앞에 있는 책도 있고, 뒤에 있는 책도 있다. 보통 소설들은 작가의 말이 맨 뒤에 있곤 하는데,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읽는 것은 일종의 나의 독서 루틴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기도 전에 김초엽 작가의 ‘작가의 말’ 글에 울컥하면서 책을 펼쳤다. 그는 이번 ‘지구 끝의 온실’ 소설을 쓰면서 든 마음에 대해 썼다.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라고. 나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그만두지 않고 그곳에서 다시 무언가를 해보리라 결심하고 행동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으로의 나와 그렇지 않는 나를 모두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울컥 했던 것 같다. 성과가 없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 앞에서도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 그 구체적 이름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책을 읽으며 나는 살아내고 싶고, 살아가고 싶지만 살아남기 힘든 시절을 강한 자로 뚫고 혼자 살아남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없다고.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생각이 퍼져갔다.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희수처럼 다짐해보았다. 이룰 수도 없는 꿈을 굳이 소리 내어 발음해보았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겠지. 나야말로 알 수가 없지.
마지막에 희수이자 지수인 지수와 레이첼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정체를 모르겠는 슬픔이 밀려왔다. 인류를 구할 생각도 없으면서 놓지도 못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 그러나 정작 서로가 궁금하고, 서로를 궁금해 하면서도 그 마음에 담은 것들을 꺼내지도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 평생을 평행선처럼 살아와 서로 마주한 채 미안하단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이들로 안녕한 지수와 레이첼의 이야기의 만나지 못한 선을 그려보다 슬퍼졌다.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고, 확장하여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결국 성대하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구원할 수 있었을 텐데.
작가는 ‘온실의 모순성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온실과 온실의 모순성을 상상하면서 이원성의 세계에서 그 어느 쪽에도 완벽히 기울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은 너무나 이분법으로 구획화 되어 있지만, 실은 그것은 너무도 허상이어서 이원성 세계에서 우리는 원하는 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일 거야. 나는 언젠가 널븐이 말해주었던 삼원성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나에게는 너무나 좋았고, 복잡했고, 서글펐던 걸지도 모르겠다. 더스트 재앙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고자 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안전지대라 여겨진 돔 안은 모든 사람들이 머물 수 없었고 약한 자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재건된 사회에서 살아남은 돔 안의 사람들은 완전한가. 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남아 온 것인가. 돔 밖에서 새로운 대안 공동체로서 꾸려진 프림 빌리지도 결국엔 따지고 보면 제한되고, 닫혀있는 공동체로서 오는 안전함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수는 알고 있었다. 그 불안과 불완전함에 대해. 그래서 돔의 안팎이 아닌 그 경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불완전하지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경계에서는 누군가 강자가 되어야 하고 누군가 약자가 되어야 한다. 같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 지수는 그게 아닌 다른 답을 찾고 싶어 했을 사람. 그게 결국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구원했는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불확실한 세계라는 것에 대해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여운처럼 따라붙는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했을지라도 나오미에게도, 지수에게도, 하루에게도, 어쩌면 레이첼에게도 안식처의 순간으로 분명 존재했을 한 마을에 대해 상상해본다. 다정이 오갔을 그 따뜻한 온실을. 무엇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볼지에 대해서도. 조금 울고 싶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붙잡고 싶은 것이 내게는, 내게도 있다.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장편소설, 자이언트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