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오늘의 착각>
1. 누군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그건 명료하게 00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별 것 아니지만 난감해지는 질문이었다. 태어난 곳과 자라난 곳이 다르고, 이제는 자라난 곳과 살아가는 곳의 시간의 겹 차이가 없는 사람. 태어난 곳과 자라난 곳에 남겨진 이 없고, 찾아가 머물 곳이 없는 사람으로서 살아온 시간이 몸에 박힌 자에게 ‘고향’은 낯선 언어이다.
허수경 시인의 책에도 고향’이란 단어가 이따금 나오지만, 나는 어쩐지 그녀가 고향이 있는 사람 같진 않았다. 고향이란 것은 서로 다른 이유로 잃을 수 있는 것, 없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녀로 인해 조금 편안하게 가지게 되었다. 한편으론 그녀에게 고향은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녀 스스로 ‘고향은 고향을 떠나서 살 수밖에 없는 현재 조건의 기원지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아직 살아 있어서 옛 고향의 모습, 한 두 가지는 지니고 있다. 아마도 내가 그곳을 떠났을 때 함께 가지고 간 것이리라. 그렇게 장소도 장소를 떠난다. 장소를 내면화한 인간과 함께 그 인간의 시간과 함께.’라는 글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장소를 내면화한 인간과 함께 장소도 장소를 떠날 수 있어서 내 고향은 존재하지 않지만, 또 모순적이게도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나에게 내면화된 장소가 내게 고향같은 무엇이 되어줄 수도 있겠지.
‘한 장소의 지정학적인 조건이 수많은 이의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이곳 역시 그러하다. 고고학적인 자취를 들여다보면 지금 이탈리아인들이 살고 있는 이 섬에는 그리스/로마/비잔티움/아랍인들이 시간을 두고 번갈아가면서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한떼 그리스인의 고향은 로마인의 고향으로, 다시 비잔티움들의 고향에서 아랍인들의 고향으로, 지금은 이태리인들의 고향이 된 셈이다. 그러니 이 지구에는 처음부터 내 조상이 살았던 곳은 없다.’는 글이 이 책에서 가장 좋았다. 그러니 이 지구에는 처음부터 내 조상이 살았던 곳이 없고, 고향이랄지 기원이랄지 얽매일 필요 없다. 물론 이런 생각은 너무나 ‘유목적’이어서 되려 더 깊은 외로움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모두 ‘난민’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의 곁과 관계망, 공간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고 있더고 생각하면 나는 외로움보다는 희망같은 진부한 말같은 게 떠올려진다. 홀대 받을 자도, 홀대 할 권리의 자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생각하게 된다. 비록 환대할 줄 모른다 하더라도. 그러니 우리는 비난할 자격이 없다. 받아들이지 않겠다 고집할 수 없다. 고향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잃은 자들의 그 이유들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고됨과 어디가 될지 몰랐을 미래,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려고 버티는 그 몸짓을.
2. ‘인류의 먼 기억은 멀어서 이미 학문 안으로 들어와 있으므로 그것을 찾는 일은 안전하나, 자신의 가장 가까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위험하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의 가장 가까운 기억이 너무 아픈 것이라 꺼내기 싫고 어설프게 꺼냈다가는 스스로에게 상처만 입힐 때. 그러나 그럼에도 별 수 없어, 싶은 것은 그 상처를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나에게 입히고 덧나고 다시 아물고 하는 과정이 나에게 낫다는 것. 애초에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꺼내기만 해도 눈물이 되고 상처가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면야 그것은 다른 아닌 내가 꺼내고 바라보겠다고. 그것이 나를 견디게 할 것이라고.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어떤 당신은 그런 내 곁에 머물러 주면 좋겠지요. 또 어떤 당신은 내가 내 핏덩이를 꺼낼 때 같이 그것을 바라보고 사과해주면 좋겠지요. 나는 나의 몸을 안전하게 하고 싶지만, 나의 과거를 안락하게만 묻어두고 싶지 않아요.
3. 오늘의 착각’은 고 허수경 시인의 생일에 맞춰 출간된 유고 산문집이다. 이 책을 만들어 온 이의 과정을 이따금 보아서인지, 책을 읽으며 이 책을 만든 이들을 자꾸 상상하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떠났을 때, 그를 기억하는 방식과 그 사랑에 대해서. 김애란 작가의 글 중에 ‘생일 초를 밝힐 때면 기쁘고 엄숙한 마음이 든다. 긴 하루가 모인 한 해, 한 해가 쌓인 인생이 얼마나 고되고 귀한 건지 알아서.’ 란 글이 생각난다. 그녀의 생일에 맞춰 편집을 하고 색을 고르고 출간을 했을 이의 고되고 귀한 마음도 자꾸 생각이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