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넬라 라슨_패싱

by 수수

넬라 라슨의 <패싱:백인으로 행세하기>는 흑인 작가들의 이야기들의 구성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노예제도 폐지 이후 짐 크로 법으로 흑인 분리 정책을 가지고 있던 미국에서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 시기 부상하던 작가 넬라 라슨의 <패싱>은 그 당시 사회의 모습들과 모순들 그 속에 존재하는 욕망, 안전에의 갈망, 고민들, 교차하는 상황들과 억압들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물라토들인 아이린과 클레어를 등장하여 강고한 백인 중심 사회에서 성별, 인종, 계급이 어떻게 교차하는 문제인지 그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패싱’이 동시에 얼마나 허상이고 흔들거릴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작가 넬라 라슨이 물라토이자 그녀의 검은 피부로 차별받아온 당사자이기에 이 문제에 대한 허상과 모순을 짚어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패싱은 흑인이란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숨기지 않고 흑인 공동체에서 삶을 일궈나가는 아이린과 가난을 탈피하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물라토 정체성 중 백인과 구분되지 않는 피부색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로 부유한 백인 남성과 결혼하여 백인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클레어가 주된 인물로 나온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게 된 아이린과 클레어 그리고 그들의 어린 시절의 다른 친구와 셋이 만난 자리가 인상 깊었는데, 그녀 역시 물라토이나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알고 있는 백인 남성과 결혼했다. 이들은 모두 출산을 하여 양육자이기도 한데, 백인 남성과 결혼한 두 여성은 자신의 아이가 검은 피부를 가졌을까봐 출산의 경험이 두렵고 끔찍했음을 고백한다. 흑인과 결혼하여 검은 피부의 자녀가 있는 아이린 앞에서. 그러니까 그 당시 물라토들인 그녀들의 안전한 그리고 안정적인 삶을 그려나갈 때 디폴트가 되려 수월한(?) 백인 행세로의 패싱임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흑인과 결혼한 아이린을 의아하게 보기도 한다. 이들이 한참 이야기를 할 때, 클레어의 백인 남편이 등장하는데 그는 흑인 혐오자이다. ‘검둥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증오하고 악마화하는 백인 남성과 백인인 척 패싱하여 살아가는 클레어의 삶의 조마조마함을 보여주는 것인데, 사실 클레어가 흑인인가? 백인이 아닌가?라는 점은 너무 무의미한 이야기이고, 물라토란 용어가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서 흑인 피가 한 방울이라고 섞였다면 흑인이며, 그럴 경우 흑인으로서 분리되고, 차별 받던 시절에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수 없기도 했다. 사랑을 차지하고, 흑인을 악마화 하는 이 백인 남성 앞에서는. 그 장면이 얼마나 블랙코미디이자, 혐오 난장이었는지. 클레어와 친구들, 그러니까 모두 백인처럼 보이고 인식되지만, 흑인이기도 한 그녀들을 앞에 두고 거리낌 없이 흑인을 조롱하고 혐오하던 그 장면을 읽으면서 화가 나서 의자에 앉은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그 장면에서 아이린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말이 어찌나 그 혐오자를 우습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백인이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흑인 혐오를 하는 이 백인 우월주의야. 네 곁의 사람들이 모두 니가 치를 떠는 흑인이란다. 그러니 그가 흑인이라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 얼마나 허상이고, 입맛대로 만들어진 권력인지. 그러나 그 권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고통 받았는지.


처음에는 아이린의 삶과 확실하게 의도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 클레어와 그 장면을 보면서 여러 질문이 이어졌다. 백인으로 패싱하여 살아가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얼마나 그 당시 사회에서 백인으로 패싱되고 싶었을까. 그것이 얼마나 안전함을 가져오는가. 그러나 그 안전함은 얼마나 불안감과 두려움을 동반하는가. 그녀는 흑인에의 혐오를 지녔을까? 자기 멸시가 아닌 완전히 나와 다른 타인의 멸시로 가능할까?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지금의 안전을 얻기 위한 상황이 얼마나 어렵게 참아내야 하는 조건일까.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가능한대로, 불가능하다면 그 불가능대로 절망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시기는 실제로 패싱 인구가 팽창하던 시기로, 흑인이면서 차별받지 않으려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나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흑인과 분리되고, 자신들은 다른, 그러니까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 사회로 진입하여 차별을 행하고, 부를 갖는 특권층이 되는 것이 원치 않든, 원하든 이뤄지는 것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으나 결국 잊지 않아야 할 것은 그들은 왜 패싱을 해야 했는가.


넬라 라슨의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아이린인지 클레어인지 헷갈리게 하는 시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말하는 그 여자가 아이린인지, 그녀가 클레어인지 자꾸만 생각하게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은 아이린이라고 자신이 비판하는 클레어의 패싱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 사이에도 계급으로서 교차하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린 역시 흑인이란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할렘 문화권에서 살아가지만, 그 안에 하층민이 아닌 계급으로서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흑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외면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서, 또한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는 ‘작은’ 패싱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린이나 클레어나 패싱 없이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럴 때 이 패싱은 비난받아야 하는 걸까. 그러나 동시에 이 아슬아슬한 패싱 없이 그들은 ‘잘’ 살아갈 순 없었던 걸까. 이 질문은 누구에게 향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해명해야 하는 건 그녀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도. 모든 여성들은 같은 투쟁을 하고 있지 않다는 책 제목이 생각났던 것은 억압을 성별 하나로만 기준 삼아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에 우린 이미 오래 전부터 살고 있고(이 책만 보아도), 패싱이란 것이 복잡하게 사회문제와 엮어진 사회에서 잘못된 화살을 던지고 있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서이지 않을까.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의 결과는 절대 손에 쥐어주지 않겠어. 너희의 고민을 풀어봐- 같았던 패싱.


<패싱>, 넬라 라슨, 글빛(이화여대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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