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현_소녀연예인 이보나
한정현 작가는 다 생각이 있구나... <소녀 연예인 이보나>부터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가 구상된 듯하고, 그의 이야기는 어떤 소설에서도 서로 만나고, 관통되는 세계관이 존재한다. 한정현은 계속해서 같은, 비슷한 이야기를 연작처럼 만나는 감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이 질리지도 않고 읽을 때마다 각자 다른 슬픔과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매번 그 아름다움에 슬퍼지고 놀라게 된다. 이성애가 당연하고 또 그것만이 정답인 줄 알고 지나치게 까불고 폭력적인 사회와 다른 디폴트 값의 사회가 한정현의 소설에는 언제나 펼쳐지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사회의 폭력은 그 안에도 어김없이 펼쳐져 폭력에 노출되게 되는 ‘이상한’ ‘아름다운’ 사람들 때문에 나는 자꾸만 한정현 소설을 읽을 때 울고 싶어진다. 우리가 보통이라고 하는 일상에서 만나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여자들과 비남성들. 피해경험자들로만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정현이 글에서는 자꾸만 내게 걸어온다. 스쳐 지나가지 않고 자꾸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이름이 없는 여자들에게 이름을 불러주세요.
사과와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오늘도 폭력을 섬기는 자리에 우리는 지치지 말고 사랑과 혁명을 이야기해요, 함께. 이름을 짓고 불러줄게. 기억할게. 그러니 낙관하자. 그러니까 나는 낙관할 수밖에. 사랑이 계속되리라는 것에.
덧; <조선의 퀴어> 소설 버전 같았던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소녀 연예인 이보나>, 한정현 소설집, 민음사
p21 아버지는 무른 고무바닥을 가진 신발을 조금 더 오래 신는 법을 고민하는 쪽이 자식의 선택을 바꾸는 것보다 현명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아는 이였다.
p48-49 제복이 정신을 괴롭혔다면 육체를 괴롭힌 건 남달리 왜소한 체격이었다. 들어가기 전 주희의 체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만신을 따르던 작은 무녀들은 주희에게 색색의 옷을 입혀 보고 감탄 섞인 칭찬을 하곤 했다. 주희는 어느 날부터인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었다. 소녀 아니냐며, 학교에서 바지가 벗겨지는 수모를 당한 날부터였을 것이다. 치마를 입고 나타난 주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는 경성에 갈 짐을 꾸리라고 말했다,
p64 “여자 옷을 끝까지 벗지 않겠다고 한 건 만신이어셨습니다.”
그의 말에 주희가 물컵을 내려놓았다. 계속 들고 있다간 놓쳐서 깨 버릴 것만 같았다. 주희가 애써 숨을 고르고 앞을 보았을 때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태어날 땐 몰라도 죽을 땐 자기 자신으로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p65 “주희, 제주도 해녀들은 숨비 소리라는 걸 낸다...... 4.3이 지난 후부터야.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소리래.”
주희가 퍼뜩 거울에 비친 자신과 이 씨를 바라보았다.
“살아남은 여성들에겐 숨소리뿐인가 봐, 말 대신 숨소리를 내.”
p67 주희가 망설이는 사이에 먼저 말을 꺼낸 건 제인이었다. 생물학도였던 제인이 소련으로 가는 국비 유학생 시험에 통과한 직후였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트랜스젠더들은 병에 걸린 게 아니에요. 저는 그걸 공부하러 갈 거예요.”
p81 제인은 학생운동에 전념하는 나를 한 번도 비난한 적이 없으나 이렇게 물은 적은 있었다. “왜 여성스러움은 그렇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거야? 여성적이라는 게 비난받아야 할 일이니? 여성이 시위의 중심이 될 수도 있잖아.” 제인은 어느새 학생운동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p96-97 하지만 나는 고모를 닮는 게 좋았다. 잔뜩 꾸미고 나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들어와 아무 설명 없이 그저 누워만 있어도 캐묻듯 질문하지 않는 고모. 누구나 가끔씩은 모든 걸 답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는 걸 잘 아는 고모. 그러니까 내가 궁금하지 않아서 질문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나는 고모랑 사는 걸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p100-101 제인이 트랜스젠더였다는 건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 알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제인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고 말을 듣고 속이 상해 우는 사람에게 “나는 그런 사람 너무 좋다.” 해 주는 사람. 그러니까 이상하고, 그래서 너무 좋은 사람.
p112 한서는 한 사람을 사랑해 보았으니까. 그래서 모두를 위한 혁명도 말할 수 있던 것 같아요.
p253 그즈음 경성은 ‘키스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형사들은 불법 키스를 단속하기 위해 종종 공원이나 술집 근처에 잠복해 있곤 했다. 하지만 그 법에 걸리는 건 동성 연인들이나 남장 여자, 여장 남자 커플이었다.
p264 “안나 씨가 가장 아끼는 거잖아요.”
그 말을 듣고 안나는 그저 웃었다. 그 웃음 속에 경준과의 시간이 있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경준과의 시간이 거기에 모두 다 있었다. 말이 비껴간 곳에 남아 있는 기억들이 그 웃음 속에 고스란히 있었다.
p270 시위를 하고 싶지 않았어? 누군가 물었을 때 안나는, 앞에 서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지켜보고 보살펴 주는 사람도 필요할 것 같아, 라고 말했고 그때 안나의 표정에는 어떤 결의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다.
p274-275 “배운 사람들은 남자랑 여자가 사랑하는 게, 아이를 낳고 국가가 정한 법을 벗어나지 않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안나 너는 알지? 이 수성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도, 이 우정도 사랑이라는 것을.”
p275 수성은 경준의 아이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했다. 아이를 지우기엔 경준릐 몸이 위험한 상태였기에 낳을 수밖에 없었다. 수성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첫눈에 알아봤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경준의 아이였지만 그런 경준을 사랑하는 사람은 안나였기 때문에, 수성에게 안나는 가족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성은 안나의 얼굴을 쓸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줄게. 그리고 기억할게. 그러니까 우리는,
“낙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