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_가녀장의 시대
‘그때 본 드라마들에게 시원섭섭한 작별을 고하며’ ‘아직 본 적 없는 모양의 가족 드라마’를 썼다는 이슬아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가녀장의 시대>를 읽었다. 읽어야 할 책들 사이에 잠시 고민하다 펼쳤는데, 재밌어서 금방 다 읽게 되었다. 제목에서 오는 어떤 무게감은 책 속에서 다른 무게감과 또 명랑으로(특히 복희와 웅의 조합) 펼쳐진다. 시트콤을 만들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이 내 머릿속에서 펼쳐져 복희와 웅이와 슬아의 하루들이 소설과 같이 그려지곤 했다.
가부장의 시대를 지나, 가모장이 아닌 가녀장의 시대를 쓴, 아니 사는 소설 속 슬아는 돈을 잘 쓰는 가장이다. 그냥 돈을 잘 쓰는 게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지를 잘 아는. 슬아는 복희가 만들어오는 된장의 가치, 손님이 올 때 요리를 하는 것에 대한 수고 등에 대해 수당을 지급한다. 그것은 슬아가 하지 못하는 것이고 복희가 아주 맛있게 잘 하는 것이라 그것은 마땅해보이기도 하고, 또 뭐든 돈으로 해결하는 것처럼도 보일 수 있지만 여지껏 그 노동에 대한 임금은 커녕 수고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되지도 않았기에 가녀장 슬아는 돌봄과 사랑의 수고를 허투루 하지 않음에 대한 표현이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휘몰아치지 않은 일정한 진폭을 느꼈다. 그의 에세이를 읽을 때처럼. 나는 그런 상태의 그의 글이 좋다. 어떤 큰 한숨을 묵묵하게 지나온 이는 한숨을 계속 갖더라도 그것을 쥘 수 있는 손아귀 힘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말해온 그 사랑이란 것이 없이는 또 그것이 참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대목들에서는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이슬아를 위한 복희와 웅이의 애정이 담긴 설명을 같기도 하고, 복희와 웅이를 향한 인정과 바람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름이 그대로이고 또 에세이에서 보아오던 이들의 변형의 소설이라 경계가 오가며 읽게 되었는데, 그게 또 나쁘지가 않았다. 판타지가 아니라 다른 관계와 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해주어서.
새삼 소설을 읽으며 “와, 이슬아 작가는 대단하다” 생각하며 소설 속 상황에 깔깔 웃기도 했다. 매일 연재를 하던 그가 소설까지 써내고 시트콤까지 꿈꾸는 것. 그건 그가 꾸준히 버텨온 사람이고, 쓰기를 해온 사람이기에 가능할 터였다. 자신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갇히게 하지 않고 확장해나가기 위해 받아들이는 사람 같기도 하고. 소설을 덮고 이슬아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태초에 가부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시대다. 다른 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잃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장편소설, 이야기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