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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Aug 25. 2023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_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작가의 신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었다. 매우 좋아하는 작가의 새 소설이라 책을 손에 드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책 제목이기도 하고, 첫번째 수록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처음 읽었던 2020에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울었고, 또다시 읽는 2023년에도 나는 울었다. 대학원에 가고 싶은 오래 바람을 아직도 하지 못한 채, 현실에선 대학원이 생각과 다른 세상이란 주변의 이야기들을 접하며 오묘한 나의 마음을 이 소설이 결계 치듯 감싸며 더욱 오묘하고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곳이 희미하더라도 나에게 빛이 되어줄 것이라 오래 생각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나는, 나도, 더 가보고 싶은 것뿐이기에. 이게 흩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들. 사라지지 않고 나와 함께 나아갈 길에 대해 빛을 내고 빛을 만들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하게 그가 있던 시절. 내가 이 자리에 마무는 동안, 어디론가 떠나고 사라진 사람들. 어쩌면 그들에게 나 역시 머무른 사람일지도 모르고. 가끔 누구도 들리지 않는 음량으로 이름을 부르곤 했다. 서글퍼하던 시간을 지나 오늘까지 왔다. 나는 잘 지내. 너도 그러길 바라. 네가 내 앞에 없지만, 그때의 그 빛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사라지지 않고 존재해. 고마웠어.


너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사랑 그대로 사랑이 되지 못하고, 사랑의 모양을 잃고 미움과 뒤엉켜 쏟아질 때가 있다. 그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에도 실수는 작정한 듯 실수의 모습이 아닌 채 드러나고 마는 뒤섞인 듯한 ‘몫’을 읽으며 좀 아팠다.


누추한 마음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나눌 때면 누추하지만은 않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좋아할 수 있게되는 경험은 삶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흔한 풍경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처지와 삶의 고민, 혹은 의도하지 않았어도 일어난 오해 속에서 서로의 인생에서 비켜난 존재가 된 ‘일 년’. 조금 슬픈 일이지만 그걸 서운해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이 개입되지 않게한 다희와 지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답신’에 대해서는 지금의 ‘언니’를 내가 탓할 수 있을까. 탓하기만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 조금 괴로웠다. 왜 맞고, 당하고, 이상한 취급은 ‘나’와 ‘언니’만 되는가. 그 취급에 ‘너’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약속한 조카인 ‘너’가 너의 아버지처럼도 너의 어머니처럼도 되지 않기를. 꺽이지 않기를. 잘 살아가기를. 그 오랜시간 바라는 마음은 끝내 ‘너’에게 닿지 못할지라도. 그럼에도 이 글을 읽을 때, 읽고 나서… 너무 괴로웠다.


‘파종’을 읽고는 책을 덮었다. 흐르는 눈물이 더해질 것 같아서 읽기를 멈췄다. 너무 좋아서 아껴 읽고 싶단 마음이 들다가도 멈추기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다가 파종을 읽으면서 수 년 전 어름이 생각났다. 최은영 작가의 첫 책인 <쇼코의 미소>를 읽으며 그리고 그뒤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으며 그 여름의 순간 나는 계속 울었다. 하나의 단편을 읽을 때마다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지금 이 책 역시 그때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내용도 상황도 시간도 다 변화했는데, 어떻게 그 감정과 마음의 닿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며 글을 쓰는 사람일까.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건가요…? 사라지는 고통과 사라지지 않는 고통, 사라지는 기억과 사라지지 않는 기억. 우리 앞에 빚어진 이 슬픔이 언젠가 사라질까, 끝내 사라지지 않고 머무를까. 그러나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비단 슬픔과 통증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 여겨졌대도 그 존재를 유지해온 것, 내 마음에 자리잡은 것, 기어이 내가 통과해내고 살아낸 것, 질기다 하더라도 다정한 그것, 일지도 모른다. 따뜻한 포옹을 잊지 않겠다.


‘파종’을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나와는 일면식이 없는 그 분이 얼마전 세상을 떠났다. 수 년간 병과 함께 살아온 그의 파트너를 알게 되어 그 역시 알게 되었는데, 평화운동을 해온 그를 이미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고, 그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들을 보았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하는 마음으로 바라만 보던 시간이었는데 ’파종‘을 읽으며 만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그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어 그를 너무나 사랑하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시간이 잘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지영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 책의 소설들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용산참사, 대학의 성폭력, 아내 폭력, 미군의 기지촌 여성 살해(&그것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서사), 불안한 일자리, 젠더화된 돌봄과 여성들이 이곳에 존재한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우리가 잊고 지낸 세계를 혹은 한켠에 제대로 모양 잡히지 못했던 목소리들을 끌어 올리고 바라보게 한다. 또한, 그의 소설은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바라보며 살지 않았던 세계를 만나게 한다. 소리 없이 천천히 흐르는 눈물은 금방 마를지 모르지만, 존재했던 일이기에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글을 만나기 전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어디론가 우리는 다다르고야 말 것이다. 그가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마음 덕분”으로 나는 이 글들을, 이 필사적인 마음을 만났고, 받았다. 그 마음 덕에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 “사랑을 하는 일에도 받는 일에도 재주가 없었지만 언제나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는 그에게 사랑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소설을 함께 만난 당신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사랑은 당신이 아주 어두울 때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소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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