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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Sep 22. 2023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_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나는 그가 정성과 예의를 갖추며 최선을 다해 침범하며 사랑하는 것들의 쓰기를 좋아한다. 그가 굽어 살피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중하게 여겨 일렁이는 글로 만들어가서도, 집으로 여자들을 데려오는 이여서도, 자신릐 안팎이 혼자의 힘만이 아니라 곁과 동료들과 함께 하여 가능케 되는 것들을 알아서도, ’나‘이면서도 사랑할 때 우리가 오로지 내가 나만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이 서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임을 알아서도ㅡ 이슬아 작가의 글은 생에 대해 오로지 기쁨과 행복만이 아니라 슬픔을 감각하고 슬퍼할 줄 아나, 결국 사랑으로 자리잡아 무덤가에 새로운 꽃을 또 심듯이 생을 살아가고자 하여ㅡ 좋다. 이슬아의 글은 이물감이 방해하지 않고, 정말 좋아하는 그 마음 그대로 좋아할 수 있다. 그런 나도 좋다.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산문집, 디플롯


p28-29 사람들이 웃고 나도 웃는다. 그런 질문을 삼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한테 장난스레 여쭤본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으시겠어요?

 할머니는 설레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작가님이 꼭 결혼하면 좋겠어요. 애도 낳고요. 그럼 또 얼마나 삶이 달라지겠어요? 그럼 또 얼마나 이야기가 생겨나겠어요? 나는요. 계속 달라지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나는 눈시울이 벌게져 버린다. 절벽 같은 세상에서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덜컹이는 일인지를 곱씹으면서도, 누가 내 얘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듣고 싶어 한다는 게 너무 고마워서.


p41 우리는 키스 얘기를 하면서 걷는다. 키스하는 삶이 키스 안 하는 삶보다는 대체로 낫다고 믿으면서. 하품하는 친구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대체로 낫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아무래도 빚 같은 건 없는 게 좋다고 믿으면서..... 살아가다 보면 친구가 볕이 잘 드는 집으로 이사할 날도 올 것이다. 그럼 귀한 나무를 다시 친구에게 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는 표정이 없지만 다 알 테다. 못 본 사이 친구의 영혼에 어떤 주름과 구김이 만들어졌는지.

그날이 올 때까지 친구도 나도 나무도 살았으면 좋겠다.


p68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할머니의 초라한 임종은 복희씨 가슴에 돌처럼 박혀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앞당겨지는 죽음도 있음을 그는 일찍이 알게 되었습니다.


p77 한가로운 낮에 읍내로 나가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자그마한 문학서점이 하나 보인다. 거기엔 유일하고 최고인 주인이 앉아 있다. 그는 좋아하는 책들을 딱 한 권씩만 서가에 꽂아두었다. 대형서점처럼 하나의 책을 수십 권씩 파는 일이 영월에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도란도란 책 얘기를 나눈다. 책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니까. 삶을 해석하는 게 영원한 습관이듯이. 책 얘기 하다가 서울 얘기도 하고 영월 얘기도 하고 연애 얘기도 하고 생계 얘기도 하다 보면, 어느새 책꽂이 앞에서 맥주를 따게 되고 한 캔이던 맥주가 세 캔이 되고 슬슬 해가 진다. 어쩌다 손님이라도 들어오면 둘 다 깜짝 놀라고 만다.


p81 친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매해 똑같은 기도를 올려왔다고.

 “무슨 기도?

 내가 묻자 친구가 대답한다.

 “용감한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

 나는 용감한 사람만이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다는 걸 안다. 혼자서만 용감한 사랑을 하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도 안다.


p87 이것이 동주의 마음자리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흘려보내는 것.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보고 싶으면 일단 만나러 가는 것. 옥주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은 동주와 함께 홀가분해졌다가 옥주와 함께 축축해지고 서글퍼진다. 어느 날 옥주는 모질게 굴고 나서 이렇게 사과한다.

 “저번에 누나가 때려서 미안해"

망각의 달인이자 유머의 달인인 동주가 가볍게 응수한다.

 “괜찮아. 간디도 옛날엔 조폭이었대."

 나는 옥주 같은 마음으로 태어나 동주 같은 얼굴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p90-91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더 멀리 가라는, 네가 가고 싶은 곳까지 멀리멀리 가보라는 말뿐이다. 우리는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게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삶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것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않는다는 것 뿐이다.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듯이.


p122 사랑도 우정도 실은 번갈아 가며 아기가 되는 일인지도. 나를 어떻게 할지 너에게 맡겨 버리는 일인지도. 자신을 돌볼 특권을 서로에게 바치는 동안 우리 인생은 지극히 타의 주도적으로 흐른다. 나는 그의 손안에서, 그는 나의 손안에서 마음껏 어려진다.


p131 나에게 사랑은 기꺼이 귀찮고 싶은 마음이야.

 나에게 사랑은 여러 얼굴을 보는 일이야.

 사랑한다면 그 모든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부지런해지고 강해져야 해.


p137 자신의 안팎을 오로지 혼자서 가꿔온 사람도 있을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이제는 내 삶이 타인들의 시선에 대롱대롱 매달린다는 것을 어떤 유감도 없이 이해한다. 그러나 누구의 시선에 매달릴지 결정할 권한이 내게 있음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또한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타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개를 키 우거나 번역을 하거나 노래를 하는 여자의 자의식 천국과 지옥에도 내 손길이 닿아 있을 것이다.


p138 나와 개 키우는 여자와 번역하는 여자와 노래하는 여자의 응시. 이 응시엔 권위가 깃들어 있다. 너는 아주 어어쁘다고, 너는 더 편안해져도 된다고, 얼마든지 자기 자신처럼 굴어도 된다고 이 방 가득히 천명하듯 친구를 본다. 우정은 서로에게 좋은 대명제를 주는 일. 돌아가면서 핀 조명을 쏘아주는 일. 우리는 그렇게 여럿이서 자신의 초상을 만들며 저녁을 보낸다.


p218 살아남는 이야기는 끝이 없다. 나이 든 언니들은 지난 날을 회상하며 말하곤 한다. 하나의 고생을 지나면 또 다른 고생이 있는 생이었다고. 그중에서도 어떤 언니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끝내주는 인생이었다고. 그 언니의 말을 들으면 너무 용기가 나서 막 웃는다.

 나는 내가 고생 한복판에서도 이렇게 농담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희망한다. "오, 끝내주는데? 임종 직전에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인생이었어." 그날이 죽는 날임을 미리 알아차릴 행운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삶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메일 답장 대리인도, 마감 관리인도, 요가 강사도 아닌 전업작가로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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