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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04. 2023

여분의 사랑

박유경_여분의 사랑


’여분의 사랑‘은 내가 생각한 이야기의 감정이 전혀 아니어서 가슴이 내내 졸아지는 걸 느끼며 읽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하면서, 안전이별을 못할까봐, 아니 이미 못했는데 위험해질까봐, 아니 이미 위험한 듯도 싶은데 일이 일어날까봐. 그런데 작가는 창작 노트에 이렇게 썼다. “되돌아보면 서늘하고 나쁜 관계였을지라도 관계의 끝에 어떤 사랑이든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귀하다”고. 우주와 다희를 만나고 오니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쉽지 않았지만, 사랑의 끝이 안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목에 이끌렸던 박유경 작가의 책은 처음 읽었는데, 세상에 이토록 많은 여성 작가들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을 걱정하고, 위로하고 싶어한다는 다정에 고마워지는 시간이었기도 하다.


<여분의 사랑>, 박유경 소설, 다산책방


p27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마주해도 사람들은 모두 다른 것을 보니까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말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지요. 이 책을 제게 보낸 사람은 그걸 아는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을 읽어보라고 표시를 해두었으니까요. 이해의 가능성은 우연에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우연을 뛰어넘을 만큼 대단하지 않아요. 거듭해 읽다 보니 다시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마음 이 들었어요." (떠오르는 빛으로)


p34-35 “선생님, 어디에 계시죠? 어딘지 알 수 있게 넓게 비춰 보여주세요!"

 누군가 마이크를 켜고 다리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다리 위를 비추는 화면 뒤의 얼굴이 누군지 알았다. 얼어붙은 채 화면을 보다가 제발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를 불러서 탔다. 얼마나 걸리는지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시현아, 천천히 와. 기다릴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끊어질 때쯤 가현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전화를 끊지 말라고, 끊으면 안 된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가현이 물었다. 시현이 너 때문에 떠오르는 빛을 봤다고, 정말 봄이 온다고 믿느냐고. 너를 붙잡은 내가 있으니 분명히 올 거라고 말하며 나는 가현이 전화를 끊지 못하도록 생각나는 모든 것을 늘어놓았다. 인도에 갈 때 탔던 비행기가 난기류에 요동쳐 비닐봉지를 입에 대고 있었던 이야기, 경유지인 싱가포르에서 나눠 먹었던 파인 애플주스 이야기, 우리에게 꽃을 꺾어서 내밀었던 인도 소년 이야기를 거쳐 하민의 이야기를 했다. 가현은 별다른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가현이 구급대원과 함께 있었다. 시현이 네가 말한 그 빛이 어떤 빛인지 이제 조금 알겠어, 하고 가현이 웃으며 울었다. 나는 가현을 끌어안았다. (떠오르는 빛으로)


p56 다희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죽고 싶다고 톡을 보냈다. 매주 코로나 검사를 받고, 하루 쉬고 주 6일을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하는 현장 상황을 알았기에 나쁜 마음을 먹을까봐 다희는 우주를 매몰차게 대할 수 없었다. 우주는 전화를 끊고 나면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내 사랑 목소리 들으니까 힘이 난다, 뒤엔 라이언 이모티콘이 나타나 바구니 가득 하트를 담아 뿌리거나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우주의 내 사랑이었던 게 좋았던 다희는 지나간 시간 속에 있고, 지금의 다희는 같은 말이 그토록 서늘하게 들리는 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여분의 사랑)


p74-75 서른한 살의 다희가 스물여섯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주도 그랬다. 다희는 래시가드의 물기를 몇 번이나 눌러 짜며 우주는 없다고 중얼거렸다. 엄마는 할머니와 아빠의 폭언에 메말라 버렸다. 메마른 사람이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주는 건 날카롭게 버려진 가시로 찌르는 상처뿐이었다. (여분의 사랑)


p132 지후에게 미 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주일에 겨우 십만 원 남지 벌면서 지후한테 만 원을 쓸 수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있으니 보풀이 핀 낡은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야 했다. 장사가 안 되는 건 지후의 부모나 내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치킨에서 돈까스로, 주점으로 업종을 바꾸었지만 빚만 더 불어났다. 빨리 졸업하고 돈을 벌어 학 자금 대출을 갚아야 했다. 원금 상환 날짜가 다가오는 걸 생각하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피아제의 이론에 따라 지후가 에고센트리즘적으로 사고하는 거라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라는 건 발달 단계의 수준을 넘어서는 요구일 뿐이었다. 만 원을 주지 못하는 처지가 미안할 일이 아닌 게 분명한데 정서상 아니면 분위기상 아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미안,이라고 말하고 나면 아이와의 권력관계가 바뀌지 않을까? 지후가 나를 따르며 좋 아한 이유는 눈을 맞추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었기 때문이지 대단한 걸 바라서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고시원으로 들어가기 전 김밥집에 들러 키토 김밥을 사고 카페라테를 테이크아웃했다. 아이에게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그날의 먹거리를 지킨 당위가 그제야 설명되는 기분이었다. (변신을 기다려)


p179-180 물론 임신 중지는 여성의 당연한 권리였다. 사후피임약을 찾는 고객들에겐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진료를 받고 오라고 정중하게 권했다. 열에 아홉은 진료를 보고 오지만 다시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육아에 지친 파리하고 피로한 얼굴이거나 갓 스무 살을 넘긴 듯한 앳된 얼굴이었다면 하루 종일 그 사람이 신경 쓰였다. 의사의 진료를 보라는 말이 폭 력적으로 느껴져 다시 오지 않는 것인지, 무심코 내뱉은 단어나 말의 뉘앙스가 임신 중지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 킨 건 아닌지 걱정돼 어떤 날은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사후피임약을 응급의약품으로 하자는 목소리에는 현재 유통 되는 약제의 특성이 남용될 경우 여성의 몸에 부작용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 온전히 동의할 수 없었지만, 자연 유산을 유도하는 약인 미프진은 합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프진이 도입되면 임신 12주 이내에 외과적 수술 없이 임신 을 중지할 수 있었다. 이미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약을 도대체 왜 인정해 주지 않는지, 불법 유통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목소리에 왜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 답답했다. 여성의 권리가 조금 더 두터워져 원하지 않는 임신을 지속하지 않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랐다. (루프)


p199 엄마의 자궁은 아홉을 수정했고 그중 하나를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세 번의 유산이 있었고 내가 태어난 후엔 다섯 번의 수술이 있었다. 처음 세 번의 유산이 아니었다면 나는 태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계속된 유산으로 딸이든 아들이든 자식이 없는 것보단 낫다는 마음일 때 생긴 것이 나였다. 그 후엔 성별을 알고 나서 지워졌다. 임신 5개월이 넘어 수술한 적도 있다고 했다. 상처투성이일 줄 알았던 엄마의 자궁은 살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몸 안에 있을 때의 폭력적인 존재감에 비하면 실제의 모습이 볼품없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생리 중이 아니었다는 게 그때만큼 다행으로 여겨진 적이 없었다.(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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