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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Feb 05. 2024

에디의 끝

에두아르 루이_에디의 끝


첫 문장부터 강렬한 <에디의 끝>. 폭력으로부터 시작하는 소설은 읽는 내내 폭력의 현장을 지켜보게끔 한다. 텍스트를 읽는 나는 아무런 힘이 없다. 무언가를 할 수 없다. 폭력은 무관심과 가난과 수치심과 뒤섞여 한 몸이 되고 떼지지 않았다. 작은 마을에서 남성적이지 않는 아이가 자라나기에, 남성성/여성성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곳에서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 아이가 성장하기에 별스럽지 않고 위험하지 않을 수 있기란 이렇게 어려운 일이어야 하는가. 자전적 소설에서 우리는 에디가 100%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100% 허구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에디와 또 다른 에디가 그저 에디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텍스트-읽기에서는 힘이 없는 나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에디의 끝>, 에두아르 루이 장편소설,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p13 유년기에 관한 그 어떤 행복한 추억도 없다. 그 시기에 행복이나 기쁨의 감정을 전혀 느껴 보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고통은 전제적이다. 고통은 자신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모두 없애 버린다.


p16-17 이 말을 뱉음으로써 그들은 영원히 그 말을 내 안에 낙인처럼 찍어 놓았다. 그리스인들이 달군 쇠나 칼로 공동체에 위험한 일탈자들의 몸에 새겨 넣던 그런 표식들. 사람들이 내게 그런 말을 한 게 처음이 아닌데도 내 몸을 꿰뚫은 건 바로 경악이었다. 어찌해도 모욕에는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p47-48 결국 나는 고통에 익숙해질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의미로는 노동자들이 등의 통증에 익숙해지듯이 사람들은 고통에 익숙해진다. 가끔은, 그래, 고통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고통에 완전히 익숙해진다기보다는, 고통을 감추는 법을 배우면서 고통을 받아들인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등이 아파서 밤새도록 옆방에서 울부짖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대다가 심지어 눈물 마저 흘리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코르티손 주사를 놔주러 온 의사, 그러고 나면 어머니의 염려 섞인 질문. 대체 어떻게 의사에게 줄 돈을 마련하지. 어머니는 이런 말(도)을 했다. 등 통증은 가족력이니, 유전이야. 게다가 공장 일까지 하니 얼마나 힘들어. 등 통증이라는 문제가 공장 일의 흑독함이 낳은 결과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p76-77 몇 년 후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전을 읽다가,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려 잔뜩 성이 난 여자들이 1789년에 베르사유로 몰려가서 항의를 하던 중에도 군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자연스럽게 국왕전하 만세!라고 외치는 장면을 기술한 대목에서, 내가 유년기를 보낸 마을의 주민들과 특히 나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리라. 권력에의 전적인 복종과 항시적 항거 사이에서 찢긴- 그들 대신에 발언을 해왔던 - 그들의 육신.

 

요컨대 분노에 찬 여자다. 하지만 자신에게 늘 들러붙어 있는 그러한 증오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지 못한다. 홀로 텔레비전 앞에서, 혹은 아이들을 데리러 온 다른 어머니들과 교문 앞에서 분개한다.


p86-87 그즈음, 어머니의 가장 충동적인 반응을 촉발했던 것이 일상의 다급함이었다지만(부족한 돈),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자기보다 더 높은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 또한 정기적으로 거의 애원하다시피 피력했다. 네가 살아가면서 나처럼 개고생하는 건 싫어. 난 막살았고 후회해. 열일곱에 애를 잖니. 그 뒤로 엄청 고생했고, 한자리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못 했지. 여행도, 아무것도. 평생을 집안 살림을 하느라, 내 새끼들이 싸지른 것이든 내가 돌보는 노인네들이 싸지른 것이든 간에 똥치다꺼리를 하느라 평생을 다 썼지. 난 바보짓을 했단다. 어머니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진정 원한 것도 아니면서 보다 나은 삶, 보다 쉽고 보다 편한 삶, 가계를 제대로 꾸려 가지 못하리라는 끊임없는 근심이나(아니, 차라리 항 시적 불안이나) 공장과는 거리가 먼 삶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막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 잘못 내디딘 발 걸음이 월말이 되면 먹고 살 수 없는 상태로 이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밟아 온 길, 본인은 실수라고 부르는 그것이 되레 완벽한 논리 위에 거의 미리 결정되어 있는 준엄한 메커니즘의 일부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부모, 형제자매, 자식들까지, 마을 주민 거의 전부가 동일한 문제를 겪었음을, 따라서 그녀가 실수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상황 전개의 가장 완벽한 표출일 뿐임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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