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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Jul 06. 2024

쓰게 될 것, 사랑을

최진영_쓰게 될 것

2020년부터 2023년 발표된 최진영 작가의 단편소설 모음집 <쓰게 될 것>. 문학지를 (잘) 읽지 않기에 짧게는 몇 개월부터 수 년이 지나 만나는 작자의 ‘최근’ 단편들이겠다. 물론 그 사이 작가의 장편을 만난 시간이 있지만.


내지 속 ’우리는 서로를 버릴 수 없었다‘는 문장과 뒷표지의 해설의 일부를 읽고 책을 읽기 전부터 왈칵하는 마음이었다. 전쟁 중, 이라고 해도 맞을지 모르겠지만 폭탄이 언제 떨어질 지 몰라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창에 테이프를 붙이는 것인 이들을 만나며 작가의 글 중 한 문장을 계속해서 떠올려본다. ‘우리는 지루할 정도로 안전하다’는 지어진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그러니까 상상 속의 그들에 대한 문장을. 결코 안전하지 않은 이가 하는 상상의 ‘지루한 안전’에 대해. 그리고 다시 엄마를 보며 쓴 문장에 대해 여러 번 읽으며 생각했다. ‘결심했으므로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란 문장. 나는 왜 이리 이 문장이 따끔거리는지, 실은 알고 있다. 나는 결심을 망설이며 겁을 내고 불안해하는 사람이란 걸 말이다. 겁 많고 두려움 많은 내가 망설이는 것들, 겁 많고 두려움 많은 내가 망설임 속에서도 하는 것들, 망설이며 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아니라서. 매번 부끄러움을 안고서 살아가면서 또 매번 나와 친구들의 안전과 사랑을 그리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실은 망설임에 기대어 있는 것 같아서.


최근 읽은 소설도, 그렇다고 최근이라고 할 이전에 읽은 최진영 작가 소설도 ‘퀴어’ 소설이 아니었음에도 문득 소설을 읽다 퀴어 소설이 아니구나, 인식할 때 첫 사랑이 여성인 여성인 주인공의 회상이 나왔다. 너무 좋아서. 그런 소설을 만나니 이성애 디폴트가 아닌, 다른 ‘보통의’ 세계를 만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었다. 여튼, 이 이야기가 나온 [ㅊㅅㄹ]은 40대 여성 서진과 10대 청소년 은율의 채팅(이상한 거 아님)을 읽으며 후훗 미소도 나고,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인 사랑을 더 잘해보겠다는 은율의 마음에 나도 가 닿고 싶다고 생각했다.


최근 챗GPT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는 와중, 나는 잘 도태되어 가고 싶다는 바람을 갖곤 한다. 이 세상은 너무 불필요하게 과개발되고 과잉 생상되고 있고, 그에 착 붙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건 과하게 버려지고, 과하게 격차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도태는 그런 것이다. 멈출 줄 모르는 세계에서 잘 멈춰서고, 친구들과 안전하게 관계를 엮어가며 돌봄으로 돌보는 세계. [인간의 쓸모]는 AI에 인간의 쓸모가 밀리는데도 인간은 더 높고 나은 인간을 만들고 싶어서 AI를 이용해 배아를 디자인한다. 자신의 내면의 주머니를 모부가 그려놓은 미래와 다르게 그려나가기 위해 코뮌의 노아를 만나러 가기를, 결심한 뒤 망설이지 않는 안나의 내일에 안나가 심은 신념의 나무가 잘 자라나길 마음 깊이 응원하고 싶었다. 나는 안나 역시 잘 도태되길 바랐다. 내가 친구들과 그렇게 살고 싶듯이.


이 책에서는 곳곳에서 불안이 발산된다. 그러나 사실 또 따지고보면 우리 인생에 불안이 그렇다. 나 역시 불안이 나의 근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불안해서 지금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떠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사랑으로 쓴 최진영 작가의 글을 만나 기쁘다. 나도 사랑을 두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을 만들고 사랑을 할 것이기에.


전쟁이 멈추길.


<쓰게 될 것>, 최진영 소설집, 안온


p19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냈다. 없는 사람처럼 있기. 방에서 발끝으로 걸었다. 속삭이듯 혼잣말을 했다. 의자를 끌지 않았다. 울고 싶으면 옷장에 들어가 이불에 얼굴을 박았다. 엄마는 나에게 밖은 위험하니까 절대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무작정 믿었는데,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엄마는? 엄마는 위험한 밖으로 매일 나갔다. (쓰게 될 것)


p21 엄마 새는 아기 새에게 줄 벌레를 잡으러 둥지 를 떠났다. 엄마 새가 자기에게 오는 길을 혹시라도 잃을까봐 아기 새는 계속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를 수 있다니. 어떤 금지도 없이 그럴 수가 있다니. 아기 새가 부러웠다. 동시에 용기가 생겼다. (쓰게 될 것)


p26 어느 날 엄마가 창에 검은색 테이프를 붙였다. 테이프와 테이프 사이에 틈을 남겨두어서 빛이 조금은 들도록.

 이걸 왜 붙여?

 유리가 깨질 수도 있으니까.

 유리가 왜 깨져?

 근처에 폭탄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제 나는 말할 수 있었다.

 폭탄이 떨어지면 우리가 깨질 거야.

 엄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몸에도 테이프를 붙이자.

 엄마는 내 몸에 얼기설기 테이프를 붙여주면서 웃었다. (쓰게될 것)


p34-35 엄마는 나를 업고 걸었다. 엄마 등에 얼굴을 기댄 채로 '전쟁이 끝나면'이란 말을 곱씹었다. 숨바꼭질은 못 찾겠다고 크게 외치면 끝난다. 전쟁은 어떻게 해야 끝날까? 끝을 지나면 할머니도 돌아올까? 죽어서 아주 작아진 사람들 전부 원 래대로 돌아와 예전처럼 살 수 있나? 나는 고양이가 물고 간 아기 새를 생각했다. 아기 새는 돌아올 수 없다. 엄마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아는 척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엄마가 그렇게 믿길 바라니까. 아주 작아진 내가 엄마 근처 어딘가에 함께 있다고. (쓰게될 것)


p36 나는 이 전쟁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잠깐의 어리석은 혼란이라고 믿었어. 전쟁이라고 말하면서도 전쟁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 매일 폭격과 총격전 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체를 보면서도. 엄마를 잃어놓고도. 나는 내가 겪는 일을 부정하기만 했어.

 엄마는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 같았다. 결심했으므로 망설이지 않는 사람. (쓰게될 것)


p39 엄마가 일기에 썼던 문장을 기억한다. '죽어야 한다면 죽는 게 낫다.' 나의 일기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살아야 한다면 사는 게 낫다.‘ 무의미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매일 밤 삶을 선택한다. (쓰게될 것)


p57 이유진은 내 편의를 많이 봐줬다. 출근하면 밥은 먹었느냐고 먼저 물었다. 당시 내게 그런 걸 매일 물어보는 사람은 이유진뿐이었다. (유진)


p59-60 그들의 관심사인 명문대와 강남과 명품 등에서 나는 엄청 멀리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나의 껍질을 자꾸 벗겨냈다. 모른 척하고 싶어서 아주 깊은 곳에 숨겨둔 나의 근성을 끄집어냈다. 나는 그런 대화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유진)


p97 권태에 빠진 남편에게 독서 모임에 같이 가자고 권해볼까 잠시 고민하던 서진은 곧 마음을 다잡았다. 남편을 사랑하고 아끼지만, 남편이 포함되지 않은 채로도 충만한 세계 또한 필요했다. (ㅊㅅㄹ)


p99 진짜 첫사랑은 고등학생 때 찾아왔다. 동아리 선배를 2년 동안 사랑했다. 왜 여자를 사랑하는가 고민하진 않았다. 왜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가 고민한 적 없듯. (ㅊㅅㄹ)


p110 > 서진 님

 > 고맙습니다

 > 진심으로

 > 저는 더 잘하기로 했어요

 >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ㅊㅅㄹ)


p118 제목. 그때 내가 몰랐던 것들. 높고 푸른 하늘. 느리게 흐르는 구름. 나뭇잎을 쓰다듬는 햇살. 고요히 날아가는 새. 새를 돕는 바람. 흩날리는 흰 꽃. 다시없을 1초. 고유해서 고독한 나. 그리고. 오늘 내가 죽는다는 것. (썸머의 마술과학)


p187 코뮌은 가난한 곳이잖아요. 그럼 돈 받고 하는 게 낫지 않아요?

 가난의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 같은데요?

 코뮌에서는 정말 배아 디자인 안 해요? 질병 제거도?

 기본적인 건 합니다. 기본 이상을 안 하는 거지.

 그럼 당신은 몰라요? 당신 미래 모습을?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현재의 나만 알아요.

 그 순간 안나는 깨달았다. 열등감이 아니었다. 거대한 상실감이었다. 안나에게 없는 미래를 상대는 아주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쓸모)


p212 이제 결혼이나 출산은 당연한 라이프 스테이지가 아니야. 엄청난 도전이라고. (디너코스)


p225 남편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은 인기가 많아서 언제나 많은 팬을 몰고 다녔다. 열성적인 팬들 - 불안, 걱정, 두려움, 연민, 후회, 원망, 의심, 죄책감 등은 행복을 혼자 두지 못하고 엉겨 붙었다. (차고 뜨거운)


p230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 엄마가 어린 나를 키우던 나이와 내 나이가 같아지면서 깨달은 바가 몇 가지 있다. 엄마는 나의 유일한 보호자였다는 것. 사랑의 방식은 모두 다르다는 것.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다는 것. (차고 뜨거운)


p236 역 광장에서 이모 부부를 만났다. 이모부는 포대기를 둘러 아기를 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손 을 잡고 있었다. 이전에도 분명히 봤겠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라도 봤겠지만, 마치 그때 처음 본 것만 같았다. 손을 잡은 두 어른. 다정한 사이. 사랑하는 관계. 나는 엄마 손을 더욱 꼭 쥐면서 물었다. (차고 뜨거운)


p248 내가 아이였을 때는 엄마에게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둘 다 어른이어서 적당한 거리를 지키지 않으면 충돌하고 깨진다. 깨진 잔여물은 타인을 위협하고 상처는 영영 남는다. 엄마와 아빠의 충돌처럼. 엄마는 나를 자기 구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나는 엄마와 같은 궤도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차고 뜨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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