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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사냥

이민주_페미사냥

by 수수

2025년, 읽기를 마친 첫 책은 <페미사냥>이다. 이 책은 ‘2016년 넥슨 성우 교체 사건부터 ‘페미’에 대한 낙인이 심화된 2024년까지 발생한 주요 사건을 살피며 이를 둘러싼 배경, 전개, 심화, 결과를 분석한다. ‘사냥의 현장에 쏟아지는 조롱과 혐오를 단순히 전시하고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것이 특정한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하고 상호작용해 온 현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17).’ 또한, ‘지금의 참상을 당연한 일로 흘려보내지 않고, 상대의 책임을 묻고 저항의 대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다(16).’ 이 책을 통해 게임, 웹툰 등 창작자들에게 향해지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중심으로 무자비하게 억지 논리로 진행되었고/진행되고 있는 페미사냥에 대해 들여다보고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물론 그런 억지는 앞에 든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서브컬처 속 존재하는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측면들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더는 그런 방식으로 소비하고 즐기지 않겠다는 선언들이 페미사냥을 해온 이용자들에게는 그저 자신들의 재미를 방해하는 요소로만 여겨졌겠지만, 이러한 실천들은 누군가의 재미를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면서 즐기는 것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른 방식으로서 즐겁기 위한 분투였다. 그런 억지와 무차별적인 공격은 오랜 시간 성별균형적인 이 사회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엎드린 채 들어준 시장-기업 덕에 먹혀들어갔고, 정당한 것처럼 포장되었다. 집단으로 타자를 공격하고 굴복시키는 즐거움에 도덕적 당위까지 얻어낸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럼에도 여성/페미니스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는다.


“혹시 페미?”라는 것이 밈처럼 나돌아 다닐 때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응 페미, 라고 응답하기로 했다(대구에서도 그와 같은 이름으로 포럼을 진행하며 페미니스트들을 만났다). 낙인찍기와 공격에 홀로 개인으로만 인지되어 움츠리고 지치게 되는 이들이 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언제나 존재하기도 한다. 페미사냥에 균열을 내기 위해, 가만히 당하지 않고 폭로하기 위해, 손을 잡고 연대하기 위해 멈추지 않는 이들이. 다시 말하기 위해 오늘도 지친 곁을 살피기도 하고, 함께하는 내가 여기 있음을 표현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하고,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당신’들을 떠올려본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라는 노랫말처럼.


<페미사냥>, 이민주, 민음사


p13 대중화된 페미니스트 주체들은 반페미니즘 세 력보다 더 크고 강한 세력을 모아 맞대응하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그 가시화 과정에서 규모와 경제력 을 키우기 위해 포기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한국 사회는 페미니스트가 사회적으로 축출될 수 있으며 그래야 할 존재임을 인지하고 학습했다. 그렇게 페미사냥이 시작되었다.


p15 마녀사냥에 관한 여성사적 연구는 마녀사냥이 여성에 대한 전쟁임을 명확히 한다. 무자비한 공격의 원흉이 무엇이며 마녀로 희생된 여성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빼앗겼는지, 그 결과로 어떤 지배 구조가 세워졌는지를 직시하도록 한다.


p21 페미니스트들은 소비자이자 대중문화 향유자 로서 쌓아온 역량을 운동의 도구로 삼았다. ‘김치 녀'와 '맘충‘을 조롱하는 인터넷 유머에 미러링으로 대항했고, 여성을 과도하게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광고와 콘텐츠, 인물 등을 여성혐오로 문 제시하여 집단 불매하거나 민원을 넣었다.

페미니스트들의 소비자운동은 온라인 공간과 대중문화 시장에서 남성들이 느끼는 권력감에 대 한 강력한 위협이었다.


p39 한편 처음에는 '메갈'을 명목으로 여성과 페미니스트를 위축시키던 공격은 점차 '페미'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자체를 죄목 삼게 되었다. 나는 어떤 창작자에게서나 특정 창작물에서 페미니즘적 의미를 발견하면 들뜨고 벅차올랐다가도, 이를 널 리 알리기가 망설여졌다. 심지어 페미사냥 집단의 시야 안에서 무언가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기조차 주저될 때가 있었다. 본보기가 될 만한 다른 페미 니스트, 여성 창작자들이 페미사냥의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가 스스로 기뻐할 자 격이 없는 존재인 듯 느끼게 조여 온 과정. 그것이 페미사냥의 전말이다.


p51 앞서 페미사냥이 일부 남성 집단의 일탈로 분 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렇게도 말할 것이다. 페미사냥이 발생할 수 있 는 조건을 구성한 특수한 장으로 남성향 서브컬처 와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를 봐야 한다고. 이 두 주 장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페미사냥은 남성 주도성이 두드러지는 좁고 주변 적인 문화와 시장 구조 안에서 발생한 후, 사회 전 반의 남성중심적 구조와 상호작용하며 영향력을 확산해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p66-67 페미가 서브컬처 문화에 침입하여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며 즐길 권리를 남성에게서 빼앗는다는 두려움은 이들의 허상일까?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우선 그들이 말하는 페미들이 서브컬처 문화의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측면들을 망가트려 온 것은 맞고, 계속 망가트릴 것이다. 그런데 이 들이 침입했다는 생각은 틀렸다. 여성 그리고 페미니스트 소비자는 원래부터 서브컬처 문화 안에 살 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알못'이나 오타쿠계의 중심에 낄 수 없는 외부자로 상정하는 편협한 믿음과 달리 여성 오타쿠의 실천은 다층적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미소녀 캐릭터를 사랑하고, 그와 연애를 꿈꾸고, 그가 비키니 입은 모습을 즐길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실천의 의미와 효과를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기도 하리라.


p79 메갈리안은 남성들이 공유하던 안일한 동질성의 전제를 깼다. 디시를 비롯한 커뮤니티와 인터넷 하위문화가 남성만의 놀이터가 아니었으며, 언제든 타자인 여성이 마치 간첩처럼 내부자를 가장해 섞을 수 있다는 불안이 부상했다. 사실 여성들은 늘 같은 놀이터에 있었음에도 말이다.


p81 2015년 이후에 번진 페미니즘 대중화를 적극 적으로 거부하는 정서는 남초 커뮤니티 내에서 '극 소수의 메갈이 온라인 곳곳에서 대중을 선동하고 여론을 왜곡한다'는 음모론으로 구체화되었다. 음 모론을 통해 구성된 메갈의 상은 일부 온라인 커뮤 니티에서 침투해 오는 게릴라 적군의 모습이었다.


p82 무엇보다 메갈리안은 남성들의 재미를 위협했다. 한국의 온라인 하위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가치로, 남초 커뮤니티를 구동하는 핵심축은 유머다. 커뮤니티의 활력은 양질의 ‘유잼' 게시글이 얼마나 자주 ’리젠'되는지에 달렸다. 이런 온라인 하위문화의 재미는 상당 부분 여성혐오에 근거 했고, 성적 대상화된 여성 이미지와 포르노의 공유는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p83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남성중심적 커뮤니티 문화와 정체성을 재생산하고자 여성을 적대적 타자로 설정하고 여성 다수의 공간이 되는 일, 일명 커뮤니티의 '여초화'를 경계하는 담론을 생산했다. 이들은 여초 커뮤니티에서 생산된 게시글이나 여초 커뮤니티 출신으로 보이는 이용자가 유입되는지를 늘 감시했다. 이러한 글이나 이용자에게는 여초 '분탕'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p84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를 표방하는 메갈리안 의 미러링은 일상과 대중문화의 여성혐오에 문제 제기하는 실천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남성들의 재 미를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포르노 잡지, 힙 합, 코미디 프로그램, 여성 아이돌과 같은 남성 중 심 대중문화 영역에 만연하던 여성혐오 문제를 개 선하고자 이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공론화했다.


p87 메갈을 공동의 적으로 규정해 온라인 공간에서 색 출하고 배제하려면 나름의 근거가 필요했다. 이때 동원된 것이 '메갈은 일베와 다름없다'는 담론이다.


p128 페미사냥이 쥐여다 주는 가장 큰 보상은 관심이다. 특히 내집단에서 소속감을 확인하고 다른 구성원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은 페미사냥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다.


p131 이때 특히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이런 상시적인 감시의 대상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냥의 표적인 페미는 늘 비정상적 여성 집단과 동일시되었다. 이런 비상식적인 놀이에 반기를 드는 남성 사용자는 없었을까? 페미사냥을 비판한 남성이 다수 였음에도 이러한 남성은 여성에게 선동당했거나 다른 남성의 말을 듣고 전향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전향하지 않는 남성은 그의 남성성을 부정 하거나 폄하함으로써 치워졌다. 그리고 페미사냥을 비판한 남성을 넘어 그를 '선동'했으리라 여겨지는 주변 여성이 새로운 검증 대상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는 일터의 지지집단을 잃고 고립되며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페미사냥은 문화 시장에서 여성 노동자를 표적화하여 그들의 노동 환경을 악화하는 엄연한 젠더 문제 였다.


p136 온라인의 남성 이용자가 페미사냥을 통해 얻는 시장 권력은 시장의 본체인 남 성에 반하는 '남성혐오자'를 퇴출해야 한다는 핵심 논리와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강화했다.


p177-178 페미사냥이 빼앗는 것은 페미니스트의 구체적인 이야기다. '페미'라는 낙인으로 우리는 자기 세계와 고유한 즐거움과 삶의 면면들을 빼앗기거나 스스로 침묵 속에 가뒀다. 사냥에 다시 저항하려면 굴하지 않고 다시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꼭 강조하고 싶은 점은, 페미니스트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원래 뛰어나다는 것이다.

여성학과 페미니즘 운동에서 서사화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성차별적 사회구조에서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 이름 불리지 못한 사람들, 때로는 연구자와 활동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한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는 일. 그들이 이야기를 꺼내어 말하게 하고, 책임을 다해 성실히 듣고, 빈칸과 행 간을 채워 읽으며 이야기 속에 복잡하게 쌓인 층층 의 켜를 두꺼운 그대로 드러내는 일. 각자의 삶에 서 길어 올린 사소한, 마음에 안 드는, 숨기고 싶은,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이야기를 검열 없이 터놓는 일.


p194 중요한 건 이것이 성차별 구조의 문제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다. 페미사냥은 시장에서 페미니스트를, 나아가 모든 여성을 상시적 감시와 폭력 으로 길들이려 한다. 성차별로 이득을 보는 혹은 그러리라 믿는 모든 주체가 여기에 공조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는 우리가 이런 속셈을 꿰고 있음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을 것임을 요란하게 폭로해야 한다. 사냥꾼들의 공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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