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_이중 하나는 거짓말

by 수수

어느새 작가 활동이 20년이 훌쩍 지난 김애란 작가는 최근 자주 언급되는 한국 여성 작가들, 그러니까 신진 작가들과 달리 내게도 사람들에게도 이미 중견의 묵직한 작가와 같을 텐데, 생각보다 그의 작품 수는 많지 않다. 아마 위에 쓴 그래서 머릿속에 한두 명 이상은 떠올려질 작가들이 활발하게 내놓는 작품들과 달리 그는 사실 몇 권 되지 않는 소설들로 오랜 시간 독자의 마음과 손에 남은 사람이다. 나에게도 그의 초창기 작품인 <비행운>이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탐나고 질투 났던 그러나 이내 인정해버릴 수밖에 없던 단편 소설들이 그 안에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나는 이야기들의 주제는 빛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빚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아주 오랜만에 쓴 두 번째 장편 소설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소설 속에 나오는 청소년 등장인물들이 다니는 학교의 담임 선생님이 만든 자기소개 게임이다. 학생들은 자기를 소개하며 다섯 개의 문장을 말하는데, 그중 하나는 반드시 거짓을 말해야 한다. 그 문장들 속에서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찾아가며 담임 선생님의 의도는 주변의 다른 질문들이 오가면서 서로를 더 알아가게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게임은 나에게 매우 익숙했다. 수 년 간 상근 활동했던 청년들이 참여하는 자원 활동 단체에서 교육을 진행할 때면 초반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던 ‘진진가’와 같기 때문이다. 그때에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세 가지 문장을 설정했고, 그 중 두 개는 진실, 한 개는 거짓을 말하며 한 공간에 모인 자원 활동가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며 ‘진진가’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 소설을 읽으면서 그때에 우리가 놓친 것,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세 가지 문장을 둘러싸고 여러 질문을 통해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이었다. 서로 처음 만나는 불특정한 사람들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진행했지만 그 시간은 얕은 수준이긴 했다. 한편으로는 소설 속 예시처럼 담긴 담임 선생님들의 주변부 질문들은 조금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네 가지 진실과 한 가지 거짓을 둘러싸며 원치 않는 신상이나 정보가 들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별 일 없다면 그 한 해를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낼 이들에게 친밀감을 만들기 쉬운 방식일 수 있지만, 동시에 원치 않는 방식으로 민낯이 보여 질 수도 있다는 생각.


아, 물론 소설의 이야기는 저 우려와는 다른 내용이다. 그 게임에서 발화 여부를 떠나 각자에게 비밀이 있는 인물들 지우, 소리, 채운이 등장하고 그들은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비밀과 관련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것이 서로를 가깝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게는 각자의 비밀 그리고 그것에 대해 결국 나눈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크게 중요하게 다가오진 않는 듯 했다. 그보다는 왜 그는 그 비밀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것에 대해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하게 되었을까. 그가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왜, 또한 그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리고 그 거짓마저도 누구에게도 쉽게 하지 못했던 이가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건 왜였을까 하는 생각들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선호 아저씨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 아닌 ‘모두 진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은 말을 건네는가.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을 들을 수 있거나 듣게 되는가. 소설을 다 읽고 지우와 소리와 채운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작가의 말에서 작가 역시 그렇다는 것을 만나게 되어 안도감이 들었다.


언젠가 아빠가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의 서사는 이후 어떻게 나에게 정돈될까. 누구의 자식도 되지 말라는 건 끝내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훗날 그 일의 앞에 당도했을 때의 나를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때까지 나는 그 생각 아니 그 바람이었던 것이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그 하나가 아니라 다른 네 개의 진실과 같았음에 대해서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장편소설, 문학동네


p8 그러면 어디선가 옅은 수평선이 나타나 가슴을 지그시 눌러주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대단 히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물론 그런 기분은 잠시뿐이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나며,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는 걸 알았지만.


p25 선수 시절 내내 지역 스타'나 '유망주'란 얘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채운은 축구가 좋았고 선수로 계속 남고 싶었다. 정말 있는 힘을 다해도 재능 있는 친구를 끝끝내 이길 수 없던 순간조차 그랬다. 하지만 다리 부상 후 채운은 자신이 더이상 선수가 아니라는 데 익숙해져야 했다. 그러기까지 긴 부침의 시간이 있었고, 실은 지금도 완전히 극복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채운은 자신이 스스로 축구를 포기한 게 아니라고 사람들이 생각해주길 바랐다.


p66 -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 난 반댄데.

- 뭐가?

-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p75 아버지는 자신이 빈말 못하고 솔직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실은 그게 어떤 무능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p128 그때는 그냥 별 뜻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두길 잘했다 싶었다. 이제 그런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p129-130 소리는 가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꿈과 깨끗이 작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저 다음 단계로 간 것뿐'이라며, 작별한 건 맞지만 깨끗이 헤어진 전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사는데 그건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p140 -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p182 내가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까? 나는 이걸 부치고 싶을까? 모르겠어.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 이제 누구의 자식도 되지마, 채운아. 그게 설사 너와 같은 지옥에 있던 상대라 해도.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돼.


p229 - 지연이랑 얘기하고 싶어, 밤새. 우리가 함께했던 일뿐 아니라 지연이가 없는 동안 일어난 일 모두. 그리고 아저씨가 어릴 때 누군가와 무척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말들까지 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페미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