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현재 일생일대 최초의 위기 아닌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 튼튼하고 건강한 돼지가 되자는 신념 아래에 운동도 열심히 하고 먹고 싶은 음식도 가리지 않고 마음껏 먹다 보니 결국 혼자서, 인구가 안 그래도 많아 폭발할 듯한 지구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면적을 양심 없이 차지할 것 같은 신체부피와 면적을 가지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쁜 여자의 건강에 대한 우려와 조언을 아낌없이 받아들인 그는 식단과 운동을 체계적으로 시작했는데, 그리하여 장장 2달에 걸친 체중감량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니 내가 평소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극히 적어 적다. 그 와중에 김고로는 미식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 내에서 미식을 할 식당을 찾게 되는데,
그중 몇 가지는 바로 메밀과 삶은 고기이다. 평일의 어느 화창한 봄날, 김고로는 소문으로만 듣던 강릉의 전통 메밀국숫집을 찾아가게 된다.
"저기, 노암동에 유명한 전통 메밀국숫집이 있어요."
지금은, '구커피'의 영업을 그만두고, 케이크전문 카페 '알로하케이크'의 바리스타가 된 구 바리스타님이 나에게 해준 얘기가 있었다.
"전통 메밀국숫집이요? 뭐, 설마 나무틀로 면 뽑고 그러는 거예요?"
"네, 그렇죠. 그분이 목수이시기도 한데 나무로 만든 전통 면틀을 갖고 메밀면을 뽑아서 국수를 파세요. 유명한 일화로는 여기 어느 절에서 메밀국수를 배달해 달라고 했었는데, 트럭에 재료들과 면틀을 싣고 절에 가서 직접 면을 뽑아서 메밀국수를 대접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와, 그 정도의 열정이라면 진짜 전설이시네요."
"장인의 열정이자, 진짜 긍정적인 광기라고도 할 수 있죠."
전국에서 막국수나 메밀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모르지 않는다는 목수 겸 메밀국수 장인이 운영하는 메밀국숫집이라, 일본식 메밀소바와는 확연히 다른 음식이기 때문에 나의 기대가 넘쳐흐른다.
이직하는 기간 사이 발생한 잠시 쉬는 휴가의 날, 나는 장인의 메밀국수를 맛보기 위해 벚꽃이 흩날려 인도의 보도블록 퍼즐을 가득 메운 길을 달려 시내의 남대천을 건너 노암동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한적한 아파트와 넓은 도로의 경관이 펼쳐지는 조용한 거주단지와 같은 동네이다.
'H 아파트를 지나서.... H반점 근처였는데....'
곧게 뻗은 보도블록길을 따라서 쭉 달리다 보니 빼곡한 아파트 단지와 골목들을 지나서 목공예품들과 '권오복메밀국수'라고 쓰인 간판을 걸친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트럭, 그 뒤로 보이는 목공예품들, 그리고 나무 지지대를 밟아서 면을 내리는 전통 메밀면을 뽑는 분틀이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이제 막 오전 11시 반이 된 이른 점심시간이라 식당에는 텔레비전 소리만 고요히 들리고 부엌에서 고명을 써는 사장님의 부스럭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천장에 가까운 높은 벽과 기둥에는 온갖 방송국들에 출연한 사진들, 수많은 연예인들의 사인과 프로그램들의 사진들 등등 호화스러운 출연 사진들에 비해서 목수 일도 하시는 주인장분의 손길이 하나하나 새겨진 가구들과 가게의 분위기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안녕하세요~ 저 메밀국수 하나만 주세요~"
"네~"
부엌에 앉아 일하시던 부인되시는 사장님께서 주섬주섬 앞치마를 잡으시며 일어나 물을 챙겨주신다.
"저 오이 고명은 안 주셔도 돼요~"
"오이는 빼고요?"
"네네"
나와 이쁜 여자는 물비린내 있는 식재료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오이'는 그중 대표적인 식재료이다. 오이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나 오이농가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조용히 음식이 나오는 참선의 시간을 견디고 나니, 역시나 면이라서 그런 것일까 메밀국수가 금방 나왔다.
권오복메밀국수의 메밀국수, 영롱한 보랏빛 동치미
"어라?"
우리가 흔히 하는 메밀국수의 색깔이 아니다, 연한 갈색 빛의 메밀국수다. 까만색이 아니다, 면의 면면을 자세히 들어서 보니 껍질이 안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갈색빛이 은은하게 도는 메밀을 그대로 면으로 만든 것과 같은 면이다. 면틀로 뽑아서 그런지 기계와 같은 균일한 모양의 면발이 아니다, 구불구불하고 투박하며 끝이 뭉툭하거나 면발 끝이 뭉쳐있는 모습도 있다.
옅은 갈색 면발, 면 끝이 뭉툭하다
'정말 면틀로 뽑으신 면발이구나, 사람이 눌러서 뽑으니 압력이 일정하지 않아서 이런 모양이 나오는군. 하지만 오히려 이 모양이 더 손으로 뽑은 모양이라 더 좋아.'
젓가락으로 잡아서 올려본다. 찰기가 없다, 찰랑거리기보다는 덜렁거리면서 툭툭 떨어지는 모양새다. 착착 감기지도 않고 입안에서 슬슬 넘어가는 부드러운 면발도 아니다.
'밀가루는 하나도 안 넣으셨구나. 진짜 메밀로만 만드신 순 메밀국수네.'
"동치미 국물부터 먼저 마셔보세요, 그리고 메밀맛으로 드셔보십시오."
맑고 하얀 전형적인 동치미 육수는 아니다, 사탕무가 들어가서 맑은 연보랏빛의 동치미 육수이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후루루루루룩
나는 최대한 긴 호흡으로 동치미를 많이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혓바닥에 넓게 닿으며 마신다.
데이에에에엥
머릿속에 있던 잡념이나 어두운, 흐린 구름과도 같은 생각들이 맑은 하늘과 햇살로 바뀌는 기분이다. 청아하고 굵은 종소리가 온몸에 들린다. 상쾌한 햇살과 바람이 높은 하늘에서 불어오며 새파란 하늘이 눈앞에 보인다.
'뭐지.... 동치미 국물 마시고서 이런 기분이 들다니, 이거 실화인가.'
동치미 국물의 맛은 단맛도 아니고, 짠맛도 아니다, 새파란 하늘과도 같은, 맑은 하늘과도 같은 맛. 누군가는 그저 심심하고 간이 덜 되어있다고 혹평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깔끔하며 맑고 청아한 동치미 육수의 맛이 좋았다. 머릿속의 잡념이 사라지는 기분.
'동치미를 마시니 맑은 하늘이 머릿속에 보이네. 이전에 내가 먹었던 동치미들은 대체 뭐였을까. 분명 맛이 좋은 곳들이었는데. 이 집의 동치미는 다른 차원에 있는 동치미다.'
강원도식 갓김치, 고소하며 아삭하다
동치미 육수로 맑은 하늘과 태양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면발을 먹어볼 차례이다. 태양과 맑은 하늘이 이미 존재한다면, 그에 걸맞은 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동치미가 이러한 맛이라면, 면발은 무슨 맛일까'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 본다. 후루룩 거리면서 면치기를 하기에는 애로사항이 있는 순 메밀면발이다. 입에 욱여넣다시피 메밀면을 먹어본다. 소리도 나지 않게, 잠잠하게, 절간 공양시간의 막내 중처럼 나는 메밀국수를 먹어본다.
'오.....! 이 식감!'
단단한 듯하면서 꼬들꼬들한 식감, 일반적인 막국수의 식감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겠다. 탄탄하면서 입안에서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는 식감이다. 일본의 메밀소바는 껍질이 섞인 면발의 꺼끌꺼끌한 목 넘김으로 먹는다지만, 순 메밀로 뽑은 이 메밀국수는 치아로 씹는 맛으로 먹는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메밀의 향이 코로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눈앞에서 흰 눈과도 같은 꽃밭이 펼쳐졌다.
'이 고소한 향기.... 눈앞에 왜 메밀밭이 보이는 걸까. 아직 9월이 되려면 멀었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점점 내가 메밀꽃밭에 묻혀가는 기분이다. 나는 봉평의 메밀밭에, 꽃필 무렵에 가본 적은 아직 없다. 가고 싶다는 것이 나의 희망사항 중 하나이지만, 아직은 가보지 못했다. 허생원이 동이를 업고서 함께 거닐던 그 눈꽃이 달빛에 환하던 그 밭을,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메밀국수를 씹고 있는 동안에는 허생원도, 동이도 나는 부럽지 않다. 내 머릿속에 완연한 9월의 하늘과 메밀밭이 펼쳐져 있으니까.
동치미를 마시면 마실수록 온몸이 환해지고, 메밀국수를 씹으면 씹을수록 눈앞에는 눈 꽃이 고소한 풍미를 내쉬며 휘날린다. 메밀국수 한 그릇으로 이런 풍경을 나는 얻었다. 참을 수 없다, 나는 이 메밀밭의 풍경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물막국수를 다 먹기 전에 말씀드려야 식사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바로 이어서 메밀밭을 이어가겠어.
"네~ 뭐 필요하세요?"
"메밀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그러는데, 비빔도 한 그릇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조금씩 배가 차는 느낌이 들지만 하늘이 맑아지는 동치미를 나는 한 방울도 놓치고 싶지 않다. 스테인리스 면사발을 한 손으로 잡아 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보랏빛 하늘맛의 동치미를 흡입하면서 젓가락으로는 툭툭 끊어져있는 면발을 슥슥 긁어먹는다. 마침 사장님께서 비빔국수를 가져오시며 그 모습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메밀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나도 함께 웃으며 답한다,
"네, 메밀 맛이 정말 좋아요. 제가 메밀 진짜 좋아하거든요."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 있는 바는 모든 것이 진실이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사장님은 비빔 메밀을 내려놓으시며,
"양념장을 많이 넣으면 메밀향이 죽으니까 적당히만 넣으시고요, 들기름 조금에 들깻가루 조금 넣어서 비벼드셔요."
옆에 있던 양념장과 들깨고명들을 내 앞으로 밀어주시며 말씀해 주신다. 주인장의 조언을 흘려들을 내가 아니다.
"넵,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손수 공을 들여 뽑은 메밀향 가득한 메밀면의 매력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실까, 메밀향을 듬뿍 즐기는 법을 알려주시고는 다시 부엌으로 가셔서 본인의 점심식사를 시작하신다.
권오복메밀국수의 비빔국수
나는 양념장을 한두 숟갈, 들기름을 한 바퀴 휙, 들깨가루를 톡톡 넣어서 심심하게 간을 넣고서 비벼본다. 한 때 유행을 강하게 탔던 들기름 막국수의 원형이 이런 식의 단순한 비빔 메밀국수가 아닐까 싶다. 건조한 느낌으로 덜렁거리는 메밀국수들이 어느 정도 다 비벼지니 짭짤한 양념의 향과 함께 고소한 메밀향이 여름날 아침의 물안개처럼 올라온다.
'이건 또 다른 메밀밭인데.'
젓가락으로 비빔메밀을 잡아서 곰곰이, 겸손하게 씹어본다. 동치미가 없으니 이제 맑고 파란 하늘은 없지만 고소한 메밀의 풍미가 더 강하게 올라온다, 눈을 감으니 밤하늘의 별과도 같이 하얀 메밀꽃이 어두웠던 눈앞에 피어난다.
짭짤한 양념간장의 맛이 처음 느껴지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맛일 뿐 오래가지 않는다. 메밀국수의 투박하지만 기분 좋은 씹는 맛과 메밀만의 고소한 향기가 혀를 타고 온몸에 퍼지며 기분이 점점 좋아진다.
'이게 비빔이라고?'라고 말하겠지만, 비빔국수가 맞다
지금 내가 앉은 곳은 9월 깊은 밤의 메밀밭, 메밀꽃들이 살랑거리며 반짝인다. 주막의 주모가 한 그릇 불쑥 건네어준 메밀국수를 다 먹고서 입가에 메밀국수 조각을 다 때지도 않고 나는 허생원과 동이를 찾으러 나선다, 마침 개울가를 건너고 있던 터라, 천천히 걷고 있는 그들의 뒤를 잡은 나는 크게 외쳤다. 증거는 없지만 소설을 몇 번 읽은 경험과 심증으로 냅다 외친다.
"동이 네 아들 맞아!!! 네 아들 맞다고!!! 'I'm your father!' 하면 되는데 뭘 그리 뜸을 들여!! 지금부터라도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 하면 되는 거야! 책임을 지라고 이 양반아!"
뒤를 보며 커지는 그들의 눈동자와 놀라는 얼굴, 나는 다시 메밀국숫집의 원목의자에 앉아서 비빔국수를 다 먹은 채로 앉아있다. 뭐지, 지금까지 내가 어딜 다녀온 거지. 고작 이 메밀국수가 나를 머나먼 환상 속으로 보내버린 것인가.
분틀로 순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국수를 뽑는 집, 메밀향이 풋풋하고 심심한 메밀국수를 파는 집일 뿐이지만 나를 봉평의 메밀밭으로 보내기에는 충분했다. 다시 와야겠다, 강릉의 '메밀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