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강릉 중앙시장골목에 내가 사랑하던 이탈리아 간식 카페인 '로 스푼티노'가 영업을 활발하게 하던 시절, 나만큼이나 본인의 철학이 담긴 미식을 즐기시던 사장님께서는 우리에게 강릉 남대천 다리 밑에 있는 작은 냉면가게를 소개해주신 적이 있었다.
"여기 다리밑 골목 근처라서 잘 안 보이는데, 비빔냉면이 꽤 맛이 좋아요. 겨울에는 떡만둣국을 하는데 그것도 별미고요."
"냉면집인데 겨울에는 떡만둣국이라, 그것도 연관이 있군요."
"겉에서 보기에는 엄청 허름한 집이라서 눈에 안 띄어요. 그런데 여기 분들은 많이 가시더라고요."
그렇게 잠깐 로스푼티노 사장님께 강릉의 어느 냉면집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것은 작년의 상반기였다, 1년이 넘은 기억인데 최근 여름에야, 그래도 내가 존경하는 미식을 하는 로스푼티노 사장님께서 추천을 해주셨던 곳인데 한 번 맛은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쁜 여자의 손을 잡고 시내로 향했다. 마침, 강릉 시내에서 볼 일도 있었고 둘이 잠깐 걸으면서 산책도 하고 싶었기에 남대천까지 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먼 옛날에는 택시들이 모여있는 광장이었기에 '택시부광장'이라는 이름이 있는, 현 유료 주차장. L사의 영화관이 들어오는 건물은 이제 건설이 다 완료되었고 우리가 가려고 하는 오늘의 식당 '제일함흥냉면'은 (구)택시부광장 건물의 뒤편 골목에 숨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로변에 얼굴을 내밀고 있지도 않은 식당이다. 내가 지도어플로 길을 보려고 하자 나보다는 강릉에 더 오래 거주했던 이쁜 여자가 여기 골목 뒤로 가면 나온다고 나의 손을 잡아 이끈다.
"남대천 다리 건너기 전, 다리 아래 구석 쪽이네."
이쁜 여자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니 '제일함흥냉면'이라는 매우 오래된 간판을 내걸은 푸른 광택이 나는 페인트로 칠한 지붕을 뒤집어쓴 허름한 집이 나온다. 겉에서 보기에는 그냥 낡은 시골집 같은데, 여기가 냉면집이라니. 하지만 이렇게 연식이 있어 보이는 집일수록 음식은 꽤나 전통스럽게 맛이 좋겠다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장사를 했다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일테니까.
가게에 들어가니 중년의 남자 사장님이 우리를 반긴다. 어머니로 보이시는 여 사장님께서 어느 연예인이나 방송에 나왔던 사진들이 식당 안에 걸려있고 옛 집구조처럼 가게 안쪽은 살짝 열린 작은 주방, 그리고 한쪽은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좌식과 입식 홀로 이루어져 있다.
"두 분이에요?"
"네, 두 명요."
"아고, 날도 더운데 안으로 가셔요. 내가 에어컨 켜드릴게요."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 가게가 꽤나 오래되었고 방송에도 몇 번 출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사진들이 천장 가까이 붙어있다. 내가 식당을 방문한 날은 어머니 사장님께서는 나오지 않고 아들이신 남자 사장님 혼자 나오시는 날이었다.
"뭐 드릴까?"
우리는 고민은 1초도 하지 않고,
"함흥냉면 2개 주세요. 오이는 빼주세요."
오이나 물이 많은 채소, 과일 등은 좋아하지 않는 우리이기 때문에 오이가 고명으로 자주 등장하는 막국수, 냉면, 짜장면 등을 주문할 때는 항상 오이를 빼달라는 말을 얹어야 한다.
우리가 주문을 할 때쯤 입식 좌석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여성분 두 분이 앉아서 두런두런 말씀을 나누시며 식사 중이셨고, 우리가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들어오신 1팀은 남, 녀 부부로 보이시는 어르신들이었다.
'흠.... 나이가 어린 사람들보다는 강릉의 나이 지긋하신 분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집이구나.'
내가 곧잘 하는 강릉 관련 식당이나 관광 정보를 제공하는 SNS에서도 제일함흥냉면에 대한 정보를 본 적이 잘 없다 보니 현지인 외에는 잘 안 알려진 식당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곳도 옛날에 방송에 나왔을 적에는 잠시라도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겠지. 시간이 흐르니까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잊힌 것뿐이다, 그래도 맛있는 집은 단골들과 현지인들의 성원으로 그 맛과 전통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법. 덕분에 나 같은 외지인도 이 오래된 식당의 냉면을 먹을 수 있는 것, 감사하다.
"냉면 나왔습니다~ 옆에 식초, 겨자, 설탕 있으니까 취향껏 넣어드세요."
우리 앞으로 커다란 스테인리스 사발 안에 커다란 냉면 똬리가 붉은 고명조각을 머리에 쓰고 등장한다.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르듯이 올라온다, 이미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면은 거뭇거뭇하면서도 투명한 회색과 흰색이 섞인 것을 봐서는 고구마, 감자 등의 가루로 뽑아져 나온 것으로 보였다. 실보다 약간 더 두꺼운, 하지만 함흥냉면식대로 가느다란 면발들이 우리들의 인연만큼이나 얽히고설켜 둥글둥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두툼한 손가락 같은 무언가가 반투명한 살과 껍질을 반짝이며 붉은 양념을 입고 있기에 궁금했다.
"속초에서는 가자미식해가 비싸니까, 명태식해를 얹어주는데... 여기는 뭘 올려주신 거지...?"
"궁금하면 먹어보자."
그렇다, 이쁜 여자의 말이 정답이다. 음식이 궁금하면 먹어보면 된다.
쫄깃쫄깃
오도도도독
'오도독?'
부드러운 닭고기와도 같이 살아있는 식감에 쫄깃하면서 그 사이사이로 오독거리는 뼈와 같은 것이 씹힌다. 오독거리는 뼈와 부드러운 살코기, 그런데 생선의 맛은 나지 않는다?
"이거 가오리식해네."
"와 가오리식해 오랜만에 먹어봐."
그렇다, 영동지방에서는 가오리를 건조해서 구워 먹거나 찜으로 먹기도 하고 식해를 해서 먹기도 한다. 영동에서는 비빔냉면이나 막국수를 먹을 때 위에 올려주는 고명은 식당마다 천차만별이다. 고성, 속초 쪽에서는 주로 명태식해, 주문진에서는 명태식해 혹은 가자미식해를 올리며, 강릉에서는 편육이나 해산물의 식해를 올린다. 필자가 알기로 가오리는 흔하게 잡히는 생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수라상에 오르기도 했었다. 가오리는 익히게 되면 뼈가 단단하지 않고,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워서 성인의 경우 충분히 씹어먹을 수 있고 그 살은 부드럽고 쫄깃하다. 이전에 가오리찜을 먹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쁜 여자와 나는 바로 알았다, 지금 씹는 이 식해가 가오리라는 것을. 가오리찜이나 식해를 먹어본 사람은 가오리 특유의 연한 뼈의 식감과 부들거리고 쫄깃하며 사각거리는 살코기를 잊지 못한다.
달달하고 매콤하며 쫀득하며 쫄깃한 가오리식해가 치아 사이에서 뛰논다, 가오리 식해의 연골이 부스러질 때마다 살코기와 함께 물들어있던 양념장이 함께 달콤한 폭발을 만들어낸다. 이게 얼마만인가, 찾으려고 해도 잘 찾을 수 없던 가오리식해를 강릉 시내 골목의 냉면집에서 먹을 수 있다니. 특히나 해산물을 좋아하는 이쁜 여자는 신나게 가오리식해를 '오독오독'하는 소리와 함께 박자를 만들며 씹어먹고 나는 가오리 살 특유의 식감이 좋아서 잘근잘근 씹으며 면을 섞으면서 하나하나씩, 가오리식해를 위장 속으로 적립해 나간다.
일반적으로는 위에 올려놓은 꾸밈과 면을 잘 섞어서 간을 맞춰 먹어야겠지만 가오리식해가 너무 맛이 좋았던 탓에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면에 묻어있던 기본적인 양념만으로 면을 섞어서 면에 간을 묻혀본다. 사장님께서 식탁 한 편에 두고 가신 육수주전자에서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서 매끄럽게 섞는다. 그리고 한 젓가락.
후루루룩
세밀한 틈으로 빠져나와 삶아진 고구마가 섞여 잿빛을 찰랑거리는 냉면발이 입안에서 끊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가위 써서 잘라먹어."
앞니로 냉면발을 끊어가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나에게 이쁜 여자가 가위를 건네어주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함흥냉면의 면발은 일부러 쫄깃하게 만들기 때문에 입으로 끊어먹는 것이 요리사에 대한 예의라고 어디선가 보았다, 이 시대에 와서는 간단하게 가위로 잘라먹으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조상들의 옛 정신을 이어받아 튼튼한 앞니로 냉면발을 끊어먹었다.
제일함흥냉면의 비빔양념은 매우 온순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다. 극적으로 달달하거나 짭짤하지 않다, 하지만 묘하게 감칠맛이 폭발하고 고소한 맛이 코끝까지 올라온다, 거기에 자연스러운 달콤함에 찰지고 쫄깃한 면발의 식감이 빈칸을 채운다. 달콤하거나 짭짤한 맛이 거의 없는데 이거 왜 맛있지? 양념을 한번 떠먹어본다.
단맛으로 인해서 감칠맛이 날 수는 있겠지만 양념장에서 나오는 단맛은 그러기엔 충분치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설탕과 식초, 겨자를 넣어 간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육수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따라 마셔본다. 입안과 코에 표고버섯 특유의 향기가 퍼진다.
'표고버섯, 다시마, 그리고 엷은 고기맛!'
표고버섯와 다시마, 그래 찾았다. 네가 감칠맛을 폭발시키는 비밀이구나(주방에 물어본 게 아니니까... 아니면 말고.... 쭈글..). 라면이나 떡볶이에 곧잘 단맛과 감칠맛을 위해서 표고버섯 가루를 넣기도 하는데, 제일함흥냉면에서는 육수에 표고버섯을 넣어서 우려내시는구나.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제일함흥냉면의 비밀을 찾아낸 나는 웃으면서 다시 한번 면발을 입으로 넣는다, 앞니와 어금니를 동원해서 잘근거린다.
쫄깃한 면발을 씹을 때마다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감칠맛이 튀어나온다, 간이 조금은 약한 것 같지만 추가적으로 양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설탕이나 식초, 겨자를 넣으면 자극적이고 강한 맛들이 지금 냉면에서 선사하고 있는 온순한 달콤함과 고소함과 풍미를 망칠 것 같아서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강한 풍미를 갖고 있지 않아도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을 갖고 있다, 간이 센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집의 냉면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간을 조금 더 하면 될 일이다.
제일함흥냉면의 비빔냉면은 고소한 향기로 시작해서, 기본기가 탄탄한 육수와 그 중심을 잡는 감칠맛의 양념장에 쫄깃한 식감을 담당하는 면발, 거기에 입을 미소 짓게 하는 가오리 식해 사각거림까지, 눈과 코 거기에 입이 즐거워지는 냉면이다.
그렇게 먹다 보니, 분명 이쁜 여자와 나는 같은 크게의 냉면을 시켰는데 나는 청소기처럼 면을 흡입해서 순식간에 빈 그릇이 되었기에 나는 이쁜 여자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얌전히 그녀의 앞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면서,
"냉면이 입맛에는 좀 맞으셨어요?"라고 물으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어요, 또 올게요."라고 답하며 나와 이쁜 여자는 식사를 마쳤다.
추신. 이쁜 여자는 달콤하고 새콤한 양념장 맛이었다며 나와는 정반대의 의견을 주장했다. 역시나, 사람 입맛은 다 다른 것이라는 것을 오늘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