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발이형 한잔, 나 한잔, 그리고 매콤한 라조생선 한 점을 반점(飯店)에
H군과 겐쨩 카레에서 고로케와 달콤한 카레를 곁들인 식사를 마친 김고로는 그가 퇴근 후에 곧잘 간다는 카페로 향했다. 부산의 역사 깊은 40 계단(원래 40 계단의 위치는 다른 곳이었지만)이 위치하고 있는 건물의 2층에 자리 잡은 분위기 따뜻하고 아늑한 카페에 그들은 자리를 잡았다.
김고로와 H군은 바리스타인 사장님이 직접 쳐서 올려준 크림이 인상적인 아인슈페너를 꿀꺽꿀꺽 마시며 비가 내리기 시작한 부산 중앙역의 40 계단 거리를 감상했다.
음식점들과 카페에서 은은하게 번지는 조명이 빗줄기, 그리고 길거리 작게나마 고인 물웅덩이에 비추인 거리의 모습에 어울려 커피맛이 훨씬 풍성했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있는 바의 창가에서 보이는 맞은편, 신장개업으로 보이는 어느 주점이 눈에 들어왔다.
홍콩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굵은 표준 한자에 붉은 글씨, 한자로 산해진미, 중식점심, 중화반점, 호흘호갈(好吃好喝: 중국어로 '잘 먹고 잘 마신다' 혹은 '맛있게 먹고 맛있게 마신다')이라는 글씨들이 갈색 알루미늄 창틀에 끼워진 통유리에 붙어있었다.
"고로야, 저기는 뭐 하는 곳일까?"
음식과 식당에 대한 호기심이라면 김고로에 뒤지지 않는 식도락가 H군이 맞은 편의 중식 주점을 보면서 질문을 던진다. 대나무채처럼 생긴 생긴 전등 아래로 녹색의 평평한 외다리 식탁에 고동색 나무와 검은 가죽으로 덮인 의자, 그리고 붉은색의 기다란 중국식 젓가락이 무수하게 꼽힌 수저통, 큰 화분 위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아이보다 큰 식물들의 조화.
8~90년대의 어둡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밝지는 않은, 은은하게 밝지만 그렇다고 침침하지도 않은 공기 아래에서 홍콩식 햄달걀 햄버거와 홍콩식 토스트, 커피와 밀크티를 섞은 동윤영을 한잔 하며 재떨이에 담배를 톡톡, 떨구는 선글라스의 어느 사내 혹은 여성이 생각나는 분위기였다.
"이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중식 주점이네. 그런데 분위기가 홍콩의 밤거리, 윤발이형이랑 중경상림, 영웅본색 생각나는 주점이군."
"그렇지? 꽤 끌리는 곳이야. 무슨 음식을 하려나."
그들은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맞은편 식당에 대한 검색을 시작했다, 일반적인 중화요릿집처럼 식사류와 요리류를 하고 거기에 중국의 술들을 탄산수나 토닉에 섞어만든 하이볼과 각종 주류들을 함께 판매하는 '동방미식'이라는 식당임을 알아냈다.
"여기 특이한 메뉴가 하나 있네."
"뭔데?"
"야, 라조기(鷄)는 많이 먹어봤어도 라조어(魚), 라조생선 들어본 적 있어?"
H군은 동방미식의 메뉴판 사진을 함께 들여다본다. 음식의 사진은 등록되지 않았으나 'FISH 생선요리' 아래 라조생선 (바삭하게 튀긴 생선포와 각종 야채를 매콤하게 볶은 요리)라고 쓰여있는 이 메뉴는 두 식도락가의 흥미와 구미를 둘 다 끌기에 충분했다.
"어쩌지, 흠... 가보고 싶은데."
김고로의 말에 H가 반응한다. 김고로는 이미 가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만약에 가면, 나는 많이는 못 먹고 조금은 같이 먹을 수 있어."
"그래?"
김고로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리고는 이내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가자. 행동을 하냐, 안 하냐, 고민할 때에는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맞아. 가자, 식도락가라면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우리 이미 저녁 먹었는데, 카페 마시고 가서 3차를 또 먹는다고? 놀랍네."
H군은 김고로의 말에 깔깔 웃으면서 자신도 식도락가 친구를 따라서 몸을 일으킨다. 이미 그 카페에서 바삭하고 촉촉한 스콘에 크림과 잼을 곁들여 먹고 아인슈페너도 한잔 했지만, 지금 눈앞에 발견한 새로운 집에 대한 궁금증에 견딜 수 없어 행동하는 김고로는 그 인생에 있어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리라.
"나는 그럼 거기서 요리 하나에 하이볼 한잔만 해야겠다."
"그래, 나도 옆에서 조금씩 거들께."
그들은 40 계단의 중간에서 40 계단거리의 광장으로 내려와 맞은편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오래된 건물의 특성상 입구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길거리에 있는 문을 찾으면 되지 않겠는가.
좁은 입구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무 난간에 색이 다른 3색의 점들이 박힌 바닥에 땅따먹기처럼 금줄이 얇게 사각형들을 긋고 있는 90년대의 건물 바닥과 계단을 2층까지 오르며, 어둑어둑한 홍콩의 식당 분위기를 내고 있는 '동방미식'의 통유리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저녁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을지는 모르지만, 아무도 없는 상황으로 봐서는 우리가 첫 손님은 아니었을까 하는 강한 추측을 하게 된다. 직원분들만 있는 그 넓은 식당에서 우리는 창가 근처 자리로 앉아 메뉴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까 지도 어플로 봤던 메뉴판과 다른 건 없네."
"그래. 그러면 우리 생각했던 대로 라조생선 하나 시켜야겠다. 그리고 나는 이 '동방하이볼'하나 시킬래, 한잔하고 싶은 기분이라."
"나는 술 말고, 다이어트 콜라 하나만."
"좋아. 주문 넣는다?"
"오케이."
김고로는 라조생선을 크게 '요리'로 하나 시키고 음료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들은 테이블에 앉아 1차 카레, 2차 커피까지 마시고 3차로 갑작스레 중국집을 온 결정에 대해 깔깔거리며 웃었다. 특히나 H군은 이렇게 밥집을 와본 적이 없기에 꽤나 재밌어했다.
그리고 주문이 들어가고 나서 바로 조리가 들어가는 동방미식이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좀 지나고 난 후, 우리가 주문한 라조생선이 등장했다.
"냄새가 끝내주는데, 매콤한 냄새가 확 올라오잖아~!"
"고소한 튀김 냄새랑 라조소스의 냄새가 훌륭하네."
고춧기름과 고추, 마늘을 비롯한 향신료들과 재료들이 하나의 웍에서 만나 몸을 어울리며 부딪쳐 만들어낸 음식의 모습과 향기는 후각과 시각으로 시선을 뺐는 중화요리의 장점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먹어보자고, 기대되네."
"그래, 그래."
그들은 각자가 들고 있던 콜라와 하이볼로 가볍게 '짠'을 한 후에, 젓가락으로 각자 안주를 시식했다.
바사삭
갓 튀겨져 나온 생선 튀김의 겉이 치아와 맞부딪혀 부서지며 고로와 H군의 입에서 소리를 울린다. 그리고 이어서 동태포로 추정되는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생선살이 쫄깃한 튀김의 안쪽면에 미끄러지며 씹힌다.
"이거 너무 맛있다, 웬일이니."
"기대 이상으로 좋은데, 매콤하고 고소한 소스와 생선이 진짜 잘 어울려."
이번 추석 때 방문한 중화요릿집 '지썅지썅'에서도 팔보채에 알배추를 썰어서 볶듯, 이곳 동방미식에서도 알배추를 넣어서 함께 볶았다. 강원도에서는 이렇게 중화요리에 배추를 넣어서 볶는 요리는 본 적이 없기에 '부산에서는 중화요리 볶음에 알배추를 넣는 것이 일반적인 건가?'라고 생각하며 배추를 집어서 씹는 김고로.
사각사각
라조 소스를 듬뿍 머금은 배추가 어금니 안쪽에서 으깨지며 소리를 낸다, 배추가 갈라질 때마다 배추 특유의 채수 섞인 달콤함과 시원한 맛이 매콤한 라조 소스와 섞이며 상큼하고 매콤한 즐거움을 준다.
"우리가 겐쨩 카레에서 카레를 한 그릇 먹고, 카페에서 커피에 스콘까지 먹고도 이게 이렇게 맛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맛있는 음식은, 배불러도 계속 먹게 되는 법이지."
분명, 배가 어느 정도 차서 많이는 못 먹겠다고 얘기한 H군은 라조생선을 앞접시에 3번째 덜어먹으며 말했다.
"H군, 너 분명 배 별로 안 고프다고 하지 않았냐?"
김고로가 웃으면서 짓궂게 묻자, H군도 지지 않고 대답한다.
"아 몰라, 라조생선이 이렇게 맛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튀긴 생선 외에는 재료들이 다양하게 들어가고 매콤하고 고소하며, 그 덕분에 풍미 넘치는 감칠맛이 계속 터지는 음식인지라 팔보채에 생선튀김을 곁들여 먹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김고로였다.
"팔보채에 생선 튀김 먹는 기분이야. 정말 고급 요리 먹는 것 같아."
"나만 그 생각한 게 아니구나? 그런데 뭐 어때, 맛있는데."
김고로와 H군은 다시 음료를 '짠'하며 각자 접시에 놓인 생선튀김을 한입 먹는다. 김고로가 주문한 '동방하이볼'은 연태 고량주나 백주 약간에 토닉을 섞은 맛인지 마실 때마다 깔끔하고 향긋하게 입을 정리시켜 주며 기름진 중국요리를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느끼함과 진부함을 바로바로 잡아주었다.
"이 하이볼 맛이 꽤 좋아, 기름진 맛이나 느끼한 맛을 마실 때마다 잡아주니까 입맛이 초기화되네. 덕분에 라조생선이 두배로 맛있어."
"그래? 나도 내일 일찍부터 출근이 아니었으면 마셨을 텐데."
시간이 지나면서 수분과 유분이 넘치는 라조 소스 덕분에 생선 튀김의 튀김옷이 계속 바삭하지는 않았지만 소스를 흠뻑 머금은 튀김옷은 이제 쫄깃하고 부들거리는 식감을 주며 끝까지 맛이 좋았다. 그리고 곁들여진 다른 부재료인 피망과 양파, 죽순 등 식감이 변하지 않고 계속 사각거리고 바삭거리는 식재료들이 함께 있어서 지루하지 않은 식사가 이어졌다.
이제는 김고로보다 배가 더 일찍 불러서 김고로에게 음식을 계속 덜어주는 H군과, 쉬지 않고 라조생선을 받아먹던 김고로는 그릇 위의 거의 모든 재료들을 다 먹어치우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하, 잘 먹었다. 처음 보는 곳인데, 오기를 잘했네."
"나도 너 따라서 와 보기를 잘했어. 다음에 또 오고 싶은 곳이야."
"그래, 우리 같은 식도락가들의 미식 '촉'은 무시할 수 없는 감각이지."
"큭큭큭, 그래, 맞다고 하자. 나도 앞으로 그 촉을 따라서 가봐야겠어."
"그럼, 손해 볼 일 없다고."
절친한 두 식도락가는 맛있는 식사에 대한 덕담을 서로에게 건네면서 다시 부산 40 계단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H군은 버스를 타러, 김고로는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러 중앙역으로 갈라지며 김고로와 H군의 저녁 식도락 여정은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