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로가 평일에 연차를 쓴, 느긋하고 시간이 남아 돌아서 강릉의 맛있는 식당들과 카페를 돌아다닐 수 있었던 그러한 날이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김고로의 인생은 김고로를 가만히 놀게 두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서는 집으로 가는데 마침 잘 알고 지내던 X작가님으로부터 서울로의 초대가 날아온다, 시간이 되고 환경이 되니 그대로 KTX를 타고 서울로 날아가 점심시간을 보냈다.
KTX를 타고 가는 길에 서울에 자주 가지는 않으니 지난여름 이후로 못 본 Y형을 보고 잠깐이라도 식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김고로. 그가 아직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하며 연락을 해본다.
[Y형, 잘 지내요? 저 오늘 서울 가는데 같이 밥 한 끼 하실래요?]
[오, 고로! 나는 잘 있어요. 마침 이른 저녁에 시간 좀 되는데, 밥 한 끼 하죠.]
[그럼 오후 5시쯤 볼까요? 제가 형 동네로 갈게요!]
[그래요! 내가 아는 집으로 가요. 밥 먹고 짧게 커피도 한 잔 합시다.]
x작가님을 어디서 만났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시청역 근처의 어느 유명한 장어구이집이었다. 장어구이집과 고급진 카페에서 거나한 식사와 마음이 넘치도록 따뜻한 배려를 받은 김고로는 x작가님께서 주신 감동을 갖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Y형이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동네는 관악구의 서울대 근처다, 서울대벤처타운역에서 내린 김고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Y형을 만나기로 한 어느 카페로 향했다. 교육감 선거에 대한 현수막이 휘날리고 도로 가운데에는 한창 공사 중인 건설장비와 인부들이 소음과 더운 열기를 뿜으며 노란 바리케이드 안에 밀집해 있다.
왕복 4차선의 넓은 길을 건너서 카페들을 들여다보면서 걸으니 서울대 자락의 동네이다 보니 카페에는 거의 스터디 카페, 독서실 수준의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 동네는 이런 게 일반인가 보다.'
카페에 가면 누구나 노트북이나 책을 들고 탁자에 앉아,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를 두고는 각자가 조용히 할 일을 하는 분위기다. 카페에서 밝고 즐거운 수다나 재잘거림보다는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하게 공부와 과제만 한다.
김고로가 들어갔던 T 모 카페도 그랬다. Y형을 만나기 전에 잠시 비대면으로 참여해야 할 회사 회의가 있어, 카페의 달달한 시그니처 음료 하나만 주문하고는 구석의 작은 탁자에 앉았다. 옆에 있던 청년도 자신의 휴대용 컴퓨터를 열고 발표자료를 작업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책과 휴대용 컴퓨터, 패드 등으로 자신의 할 일만 한다.
'마음에 드는 카페 분위기야, 조용하네.'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다 보니 금방 Y형이 온다, 아직 김고로의 회의가 끝나지 않아 눈과 손으로 '반가워요, 아직은 회의 중, 금방 끝나요'라는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며 그를 반긴다. 지난여름 강릉에서 봤던 때보다 훨씬 인상도 밝고 힘이 있는 모습의 Y형이다.
10여분 정도가 더 흐른 후, Y형과 자리를 뜨고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식당으로 걸어간다. 큰 도로에서 울려 퍼지는 차들의 소음과 공사 소리, 선거 운동 음악을 빼고는 무더운 햇살과 천천히 식어가는 초가을의 공기가 김고로와 Y형을 감싼다.
"오늘은 내가 이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식당 갈 거예요, 고로는 닭칼국수 좋아해요?"
닭칼국수라는 말에 김고로의 얼굴에 더욱더 화색이 돈다. 면요리는 대부분 좋아하는 김고로, 푹 끓여낸 닭육수에 칼국수를 말아먹는 닭칼국수를 안 좋아할 리가 없다. 집에서 삼계탕을 끓여 먹을 때마다 그 육수에 면을 말아먹는 김고로니까.
"그럼요, 좋아하다마다요."
"잘됐네요, 거기가 진짜 진국이거든요. 내가 이 동네에 손님 오면 항상 데려가는 집이에요."
그들은 큰 길가에서 벗어나 동네의 좁고 잠잠한 골목길들이 가지처럼 뻗은 주거지역의 원룸들이 나무처럼 서있는 동네로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바닥부터 위까지 1/3 정도가 흰색 시트지로 붙어 가게의 메뉴들을 나열하고 있고 그 위로는 투명한 통유리가 가게 안의 손님들이 얼마나 닭요리를 맛있게 먹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토방닭한마리, 김고로가 Y형의 소개로 방문하는 닭요리집의 이름이었다.
유명한 닭고기 공급업체인 'ㅎ'사의 닭만 사용한다는 것과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버무려진 '착한 가격'이라는 커다랗고 둥근 스티커가 붙은 집이다. 메뉴는 닭곰탕, 닭칼국수, 닭한마리, 닭볶음탕, 삼계탕 등 끓이고 볶는 닭요리는 다 하시는 모양이다.
"역시 서울이라 그런지 닭한마리 집이었군요 원래는."
"그런데 여기서는 닭칼국수를 많이 먹더라고요."
"아무래도 식사로는 그게 제일 빠르고 가성비가 좋을 테니까요."
이 집에서 여름날에 계절메뉴로 초계탕까지 했다면 환상적으로 완벽한 집이었겠다, 강릉에서는 초계탕을 먹기가 어려운 김고로의 헛된 바람.
가게 안에 들어서니 이제 막 오후 5시가 되었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제법 들어와 있다. 가게는 형광등으로 홀을 비추고 바로 정면에 간이 싱크대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은 깔끔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들이 보이는 환한 주방. 입식으로 되어있는 식탁들과 의자들은 대부분 남자 손님들이나 이제 막 퇴근을 하고 돌아오신 건설노동자분들이 많이 보인다.
혼자 오신 분들은 뜨끈한 닭칼국수, 둘이서 오신 분들은 닭칼국수를 인원수에 맞게 먹거나 푸짐한 닭한마리를 가운데에 놓고서 소주와 맥주를 기울이고 있다. 혼자 마시는 술도, 둘이서 마시는 술도 시원하게 가슴의 응어리와 어깨의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만이지 않은가. 토방닭한마리가 이 근처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을 받는 식당으로 보이는 장면이었다.
"우리도 맥주, 가볍게 한잔 할까요 고로?"
"좋지요. C 하나 마셔요."
Y형은 자리에 앉자마자 닭칼국수를 두 그릇 시키고는 시원한 맥주를 하나 주문한다. 금색으로 꿀렁이는 유리병 속의 액체가 흰 탄산거품을 내지르며 유리잔 안으로 미끄러진다. Y형과 고로가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보리로 빚어낸 시원한 술이 입과 목을 간지럽힘을 즐긴다.
그리고는 깍두기와 김치를 한 조각씩, 맛도 볼 겸 씹어먹는다. 시원하고 달콤한 무와 배추의 채수가 턱을 움직일 때마다 입안으로 흘러나온다.
"역시나 닭으로 국물요리를 하는 집이라 그런지, 깍두기랑 배추김치 맛이 좋네요."
"맞아요, 여기 깍두기가 특히나 맛이 좋아요."
그리고 그들은 잠시, 닭칼국수가 나오기 전까지 깍두기와 배추김치를 안주로 삼아 맥주를 한잔 기울이며 서로가 여름 이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나눈다. 10년 가까이 얼굴을 안 지인인 Y와 김고로는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만나며 친분을 나눈다. 그들이 함께 아는 사람들도 여럿이기 때문에 옛날 얘기와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엮이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늘어진다. 이야기가 늘어질 때쯤, 닭칼국수가 시기 좋게 등장한다.
"뜨거워요, 조심히 드세요."
닭칼국수를 영접하자 김고로는 왜 사람들이 다른 메뉴보다도 닭칼국수를 많이 주문하는지 몸으로 깨닫는다. 세숫대야만큼 커다란 스테인리스 솥에 어마어마한 양의 칼국수가 정말로 닭한마리를 넣은 것과 같은 닭고기 그리고 건더기와 함께 나온다. 이거 하나면 닭을 한 마리 먹은 기분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김고로였다.
"이거, 양이 엄청난데요. 이거 점심에 한 그릇 먹으면 저녁이 필요 없겠는데요."
"여기가 아무래도 대학가 근처이다 보니 싸고 양 많은 집들이 많아요, 토방닭한마리도 그중 하나예요. 특히나 이 닭칼국수가 백미죠."
뽀얗게 보일 정도로 맑지만 진한 국물에 숭덩숭덩 썰린 대파와 애호박이 큰 조각으로 들어간 닭고기들 사이로 헤엄친다. 김고로는 국물이 얼마나 맛이 좋을지 궁금하다.
후루룩
진하고 눅진한 맛이다, 거기에 고소하고 짭짤한 닭기름이 녹아든 육즙이 육수에 녹아들었다. 무더웠던 여름의 공기가 아직 9월을 떠나지 않아 더운 날이었지만, 몸 안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약간의 한기마저 떠나가는, 뜨끈한 국물의 진한 고소함이 온몸으로 퍼진다.
"흐으...! 국물 죽이네요."
"여기가 괜히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겠죠. 여기 점심이랑 저녁 피크 시간에는 손님이 많아서 엄청 붐벼요. 지금은 시간대가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이라 이 정도인 거죠."
"호오... 그럴만해요."
김고로는 국물에 이어 닭고기들을 건져먹어 본다. 큰고 날카로운 뼈나 오도독뼈 등은 모두 발라내져 있다, 부들부들하고 부드럽게 푹 삶아진 살코기들만 남아서 채소와 면발 사이에 숨어있다. 숨어있으면 못 찾을 줄 알고? 김고로는 고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후루루루룩
이적으적
왼손으로는 숟가락으로 국물 몇 숟가락을 마시고는, 오른손에 집어든 젓가락으로 닭고기를 잡아먹는다. 닭다리살은 탱글거리면서 씹히고 닭가슴살이 보드랍다. 제일 좋은 점은 닭육수가 진하게 녹아든 국물의 간이 잘 되어있어 닭살마저도 간간한 맛으로 고소하게 즐길 수 있다, 그것은 칼국수면도 마찬가지.
국물과 고기를 꽤나 즐겼으니 이제는 남아있는 면발들을 즐긴다. 이 면발들이 인스턴트 면발인지 아니면 직접 뽑아서 가져오시는 생면발인지는 김고로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항은 이미 토방닭한마리의 국물과 고기가 맛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정도로 진득한 맛이 눌어붙은 면발이라면, 면을 어디서 가져왔던지 아니면 생면인지 건면인지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이미 닭칼국수의 완전체가 맛이 좋은데.
후루루루루룩
뜨거워서 한 번에 많이 흡입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김고로는 한다. 안 되는 식도락을 되게 하는 남자, 그것이 김고로다. 국물과 함께 면발을 한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거린다. 면발이 닭칼국수의 국물에 코팅되어 미끌거린다, 약간의 전분이 국물로 흘러나와 국물이 탁하지만 그건 김고로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물이 소나 돼지 육수보다는 가볍고 닭에서 우러나온 국물의 고소함은 소나 돼지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중간중간 고기와 탄수화물이 지겹다면 대파와 애호박을 씹으면서 느껴지는 사각거림과 아삭 거림으로 알싸함과 단맛을 보충하면 그만이다. 국물과 함께 닭고기를 씹으면 따뜻하고 감칠맛 넘치는 국물과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이 기분 좋게 씹히며 들어간다. 거기에 매끄러운 면발로 후루룩 치고 들어가고 이어서 대파와 애호박으로 조금 더 단단하고 사각거리는 식감을 더한다.
커다란 솥과 같은 그릇에 칼국수가 가득 담아서 나오기에 고기와 면과 채소의 삼박자는 거의 끝나지 않는 삼중주처럼 수십 분을 이어진다. 든든하고 따끈하게 많은 양 먹기를 좋아하는 김고로에게는 최적의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국물이 맛있으니까, 밥까지 말아서 먹죠."
"좋아요."
밥을 한 공기 시켜서 Y형과 김고로는 사이좋게 반씩 나눠먹는다, 밥까지 함께 국물에 말아먹고 국물을 쭈욱 들이켜면서 김고로는 계획하지 않은, 비공식적 초가을 복날 몸보신이 마무리된다. 아직도 입안에 고소하고 진한 닭고기 국물이 씻겨 내려가지 않고 남는다. 마지막을 맥주 한잔으로 씻겨내려 보지만 그래도 계속 입안을 '쩝쩝'하면서 다시는 김고로다. 닭고기와 닭국물이 그에게 진한 인상을 남겼다.
"다 먹었으면 차 한잔 하러 가실까요. 원룸 빌딩에서 보이는 경치를 즐기러 가시죠."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기고 그들은 서울대벤처타운역 근처의 동네 골목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