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의 진수, 끝까지 달콤한 영혼의 단팥, 끝없이 입으로 들어가 위험해
광복동 고갈비 골목에서 맥주 한 병에 고갈비를 곁들여 느긋하고 구수한 오후를 보낸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그대로 광복동을 빠져나와서 해운대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복동에서 해운대까지 대중교통으로 다시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에 저녁을 먹기 전에 간식을 먹기로 생각한 곳에 도착하면 딱 좋은 시간이었다.
"다음은 어디로 가?"
"해운대 해수욕장 바닷가 근처로, 근데 골목 안에 있어."
그들이 향하고 있는 해운대옛날팥빙수단팥죽 집은 나이가 조금 있으신 여사장님들 두 분께서 운영하시는 단팥죽과 팥빙수를 파는 한국식 후식 가게이다. 10년도 더 전에, 김고로가 군에 입대하기 전부터 김고로의 어머니는,
"해운대 해수욕장 가는 고가도로 밑에 작은 단팥죽 집이 있는데, 거기 정말 맛있단다."
라는 말을 곧잘 하셨었다.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운대 고가다리 밑에 정말 작게 운영을 하고 있는 어떤 단팥죽 집의 단팥이 맛있어서 작은 집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말씀을 해주셨었다. 김고로의 어머니로 말씀드리자면, 김고로가 미식을 찾아다니게 하는 유전자를 물려주신 장본인으로 본인만의 입맛 기준으로 맛있는 음식을 김고로만큼이나 잘 찾으시는 분이다. 덕분에 김고로는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많은 식당들의 음식을 맛봤고 미식을 찾아다니는 지금의 김고로가 되었다. 그러한 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곳이라면 한번쯤은 가서 맛보면 좋았겠지만, 해운대옛날팥빙수단팥죽의 옛날 위치는 김고로가 혼자서 찾아가기에는 어렵지는 않지만 모호한 위치에 있어서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예전부터 어머니가 맛있다고 한 단팥죽 집인데 이제야 한번 가게 되네."
설날 연휴에 몰려든 관광객들로 인파가 북적이는 해운대 해수욕장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 내린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해변가 방향이 아닌 해운대 시장 방향에 있는 골목길로 향했다. 해운대온천사거리를 지나 바로 뒤에 있는 초원복국 집 근처 더 넓은 매장으로 이전한 해운대옛날팥빙수단팥죽 집에 도착하니 근처 집들은 연휴라서 쉬는 모양이었지만 이 집은 홀로 우두커니 매장의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는 시간은 아직 아닌 듯, 아무도 없는 고요한 식당. 저녁에 어머니와 식사를 하기로 했기에 그들은 간단하게 단팥죽 한 그릇만을 먹고 나가기로 한다. 가게 안을 둘러보니 작은 단팥죽 가게의 성공을 드러내주는 신문기사들과 수많은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 들이 다녀간 싸인과 흔적들로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포항에 새로 개업한 첫 분점에 대한 소식도 걸려있었다. 밝은 광택이 덮인 원목 무늬의 벽과 테이블들은 단팥에 어울리는 친환경적인 기운을 뿜는다.
부엌에서 잠시 단팥죽을 덥히기 위한 불소리와 무언가가 끓는 소리가 잠시 나더니,
"단팥죽 나왔습니다." 하고는 단팥죽이 금방 나온다.
부엌에 근처 떡집에서 납품된 떡들은 어디에 쓰이는지 궁금했었는데, 단팥죽이 나오고 보니 궁금증이 풀렸다. 단팥에 넣어주는 새알 모양의 찹쌀반죽 대신에 떡을 얇게 썰고 떼어서 단팥죽에 넣어주기 위해 떡이 필요했나 보다. 붉은 단팥 바다 위에 제도(諸島)처럼 수면에 떠올라있는 흰떡들이 그릇에 달라붙어 끈적해지기 전에 얼른 먹어치울 생각을 하는 김고로.
"팥죽부터 먹어볼까."
아직은 단팥죽이 뜨거우니 위에 있는 단팥의 수면에 아주 작은 물결만을 일으키며 수저로 슬슬 퍼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후... 후..."
혹시나 뜨거울까 봐 입으로 살살 불어 죽을 식히면서 앞니로 살살 긁어가며 입으로 단팥죽을 쓸어 담는다.
후루룩
진한 팥의 구수한 맛과 함께 깊은 달콤함이 혀와 입안을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진하게 달콤한 팥의 풍미가 내 머리를 잡아먹으며 온몸으로 뻗어나가 나의 감각들을 단맛으로 사로잡아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머리가 아프거나 혀가 아릴 정도로 단맛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고 은은한 단팥의 맛으로만 미각을 사로잡는 단팥죽이라는 점이다.
"와, 달다. 그런데 달지 않아."
"무슨 말이야."
"단팥죽이 혀에 닿으면 '와 달콤해'라는 생각이 뇌에 번쩍 떠오르지, 그런데 음미하고 나면 그리 달지 않아."
"나도 먹어볼게."
점심의 곱창과 그 이후 낮술의 고갈비로 인하여 배가 불러 단팥죽은 먹지 않겠다고 한 이쁜 그녀가 김고로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단팥죽과 함께 여분으로 나온 숟가락을 들어 맛을 본다.
후루룹
이쁜 그녀의 눈이 잠시 동그래지면서 표정이 밝아진다. 단팥죽보다는 소금으로 간을 한 짭짤한 팥죽을 좋아하는 이쁜 그녀이기에 단팥죽을 좋아하지 않지만,
"으음~"
이쁜 그녀는 긍정적인 소리를 내면서 한 숟가락을 더 푼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고로에게 단팥죽이 맛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런 맛이구나. 이게 정말 달달한 단팥의 맛인데 강렬하지 않고 은근하게 달아. 계속 먹게 되네."
약간의 단맛을 주는 탄수화물인 쌀밥이나 흰떡을 계속 먹게 되는 마술처럼, 해운대옛날팥빙수단팥죽은 적당한 정도의 달콤함으로 손님들의 입맛에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단팥만으로도 맛이 좋은 것을 알았으니, 이쁜 그녀도 김고로와 합류하여 같이 떡과 단팥을 퍼서 먹기 시작한다. 배부르다고 했던 이쁜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나 보다.
쫄깃쫄깃
해물육수에 풍덩 담긴 수제비와는 완전히 다른 식감이다, 입안의 잇몸과 치아에 쩍쩍 달라붙는 느낌이 들도록 늘어나는 찹쌀떡 반죽을 달콤한 팥고물에 푹 담가서 먹는 맛. 떡에는 거의 단맛이 배어있지 않고 심심한 맛이고 단팥죽이 쉽게 스며들고 많이 묻어서 팥떡인데 매우 촉촉한 팥떡을 씹는 기분이다. 거기다가 싱거운 떡의 맛이 단팥의 달콤함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면서 단팥죽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떡이 정말 찰지다."
"응, 단팥에 견과류나 새알은 먹어봤는데 이렇게 떡반죽을 던져 넣으니 이게 더 맛나게 느껴질 정도야."
시간이 조금 지나니 주변에서 산책을 하시다가 들어오는 분들이 꽤 생긴다, 근처에 산책을 나왔다가 들리시는 곳인 듯 편하게 마실 나온 복장으로 나오신, 나이가 조금은 있으신 커플분들이 많다. 대부분은 팥빙수에 단팥죽을 하나씩 시켜서 나눠드신다, 곁눈질로 단팥죽이 나온 모양을 보니 얼음 언덕 위에 단팥으로 산을 쌓은 모습이다. 나온 모습만으로도 군침이 돌아서 조금 더 따뜻할 때 오면 꼭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김고로였다.
"단팥 하나만으로 유명해질 수 있는 이유가 충분한 단팥죽이야."
"맞아, 단팥만 먹어도 진하게 단맛인데 계속 먹고 싶은 달콤함이야."
김고로는 단팥죽을 다 먹고 나서도 입맛을 쩝쩝 다신다. 단팥죽을 먹을 때마다 입안 가득, 온몸을 충분히 채우고도 중추신경까지 뭉근하게 녹이는 뜨끈하고 끈적한 단맛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 예정이다.
"우리 여기 또 오자, 팥빙수가 기대된다."
"응, 팥빙수 먹으러 오자."
달콤한 간식으로 몸을 데운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해운대 거리로 사라졌다.